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99문화풍경] 자판기문화 전성시대가 온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99문화풍경] 자판기문화 전성시대가 온다

입력
1999.10.12 00:00
0 0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기계가 지시하는 대로 춤을 출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디제이(DJ)가 될 수 있고, 기타나 드럼을 칠 수도 있다. 골프나 야구도 즐길 수 있다. 즉석에서 애청곡만 골라 나만의 CD도 제작할 수 있고,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뮤직비디오도 만들 수 있다.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문화는 역설적으로 그 시대의 억눌린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90년대 서태지를 필두로 한 댄스음악의 돌풍은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대중문화시대의 도래다.

그럼 미래의 문화는? 「자판기 문화」 「동전 문화」 「체험 문화」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 어디쯤으로 가지 않을까? 문화의 즉석 구매와 소비, 체험의 시대가 열린다.

# 풍경 1

주말인 9일 오후 서울 신촌의 대학가. 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열심히 스텝을 밟고 있다. 한쪽에서는 드럼을 신나게 두드리며 비트를 맞춘다. 어떤 사람은 기타를 메고 음을 조율한다. 여남은 명은 발박자를 맞추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일까? 가수의 연습실이 아니다. 전자오락실이다.

화면의 화살표에 따라 4~6개의 발판을 밟으면서 춤을 추는 「DDR(Dance Dance Revolution)」과 「스테핑 스테이지(Stepping Stage)」. 6월에 등장했으나 이미 오락실을 점령했다. 이 오락기는 일종의 댄스 자판기다.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선곡을 하면 음악이 나온다. 물론 춤실력은 점수로 평가된다.

「퍼쿠션 프릭(Percussion Freaks」이나 「비트 마니아」 「기타 프릭」 등 음악 게임들의 인기도 DDR 못지 않다. 「비트 마니아」는 버튼과 디스크를 통해 DJ처럼 음악을 믹싱(디제잉)하는 재미를 준다. 국내 업체가 개발한 「EZ TO DJ」도 있다. 「퍼쿠션 프릭」은 드럼이나 심벌즈 등의 플라스틱 세트를 스크린의 지시에 맞춰 두드리면 되고 「기타 프릭」은 기타 모양의 기기를 목에 걸고 연주하는 게임이다. 직접 하는 사람 뿐 아니라 뒤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재미있다.

『마치 연예인이 된 기분이죠. 기계를 통해서나마 대리 만족을 얻습니다. 스트레스 한 번에 사라져요. 이곳에서도 잘만 하면 구경꾼들에게 박수 받고 스타가 돼요. 스타크래프트 같은 것 이제 안해요』 거의 매일 DDR을 한다는 한 대학생의 말이다.

#풍경 2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최근 문을 연 TMC(The Music Company). 이곳에서는 누구나 터치스크린을 통해 원하는 곡을 마음대로 골라 CD에 녹음할 수 있다. 제작시간은 10∼15분. 한 곡당 비용은 1,500∼2,000원. 최고 14곡을 녹음할 경우 1만 5,000원∼2만원. 사진을 가지고 오거나 매장에 비치된 디지털 카메라로 즉석에서 앨범자켓도 제작할 수 있다.

「1인 노래방」은 따로 시간을 낼 필요도, 친구들을 모을 필요도 없다. 길을 걷다 한 곡 뽑고 싶으면 들어가면 된다. 공중전화 부스 만한 곳에서 300원을 넣고 나의 18번을 부르고 나오면 그만이다.

박찬호 열풍 이후 등장한 투구 기계. 동전을 넣고 공을 던지면 속도가 스피드건으로 측정된다. 작년부터 돌풍을 일으켜 아직까지도 열기가 식지 않은 스티커 자판기는 자기가 직접 표지 모델로 나오는 형태의 스티커로 발전했다. 사진이 초상화나 커리커처로 변형되어 출력되는 초상화 자판기도 등장했다.

배경화면을 선택해 춤추고 노래하면 그 모습이 그대로 담겨지는 뮤직비디오 자판기도 나왔다. 1,000원을 넣으면 작은 그물 안에서 골프 스윙을 연습할 수도 있다.

소비자 중심의 문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이런 놀이문화는 문화상품의 소비행태가 일방적인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또 일회적이고 즉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또 전자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문화가 게임의 형태를 차용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의 문화욕구는 이미 대중스타를 바라보고 환호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는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스스로 선택하며 직접 시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홍성태(문화과학 편집위원)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 컴퓨터 게임은 머리로만 즐기는 게임, 곧 정신과 몸의 이분법이 적용되는 것인데 반해 DDR 같은 놀이는 그 두가지가 합일된 형태다. 지적 즐거움 이상이 있다. 그래서 대중적 파급력이 있다. 게다가 자판기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전혀 부담이 없다. 신종 서비스 자판기의 등장은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산업적 변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 그리고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가 맞물린 결과다』

그러나 자판기 문화는 기본적으로 「나홀로 문화」 「끼리끼리 문화」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향기와 소통이 없다. 『문화가 아니다. 게임일 뿐이다』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일본처럼 앞으로 상상 못할 서비스와 문화를 파는 자판기의 시대는 분명히 올 것이며 우리는 그 징후를 보고 있다.

송영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