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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풍경'99] 디지털시대 한글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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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풍경'99] 디지털시대 한글의 운명은?

입력
1999.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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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시대 국어의 운명지난 천 년에 우리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문화 분야에서 1, 2위를 오르내릴 성과는 한글 창제가 아닐까. 9일로 한글 반포 553돌.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우리말을 우리 식대로 적어보자던 세종대왕의 바람이 결실을 이뤄 우리만의 글을 가진지 실로 반 천년 넘는 세월.

하지만 문화의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화 바람이 거세지면서 한글의 본디 모습 찾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물밀듯 쏟아지고, 국제 무역의 폭이 무제한으로 열리면서 초강대국 미국의 말 영어는 이미 세계공용어의 권세를 누리고 있다. 정보의 교류와 문화의 계발(啓發) 속도가 어느 때보다 빨라지면서 젊은이들이 중심을 이루는 PC 통신, 인터넷 등 사이버 공간의 대화에서는 표준말, 맞춤법이 완전히 무시된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언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천 년의 전환점. 국어는 이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위세 좋은 영어의 공격 앞에 면역결핍의 언어로 전락할 것인가? 사이버 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국어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

■언어패권주의 앞에 선 한글

90년대 중반 이후 짧은 시간에 가장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의사소통 체계로 자리를 잡은 인터넷. 한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 올려진 정보는 영어가 95% 이상을 차지한다. 인터넷으로 오가는 전자우편의 표기도 역시 영어 표기가 압도적이다. 그 다음이 프랑스어지만 고작 2% 정도. 영어는 현재 75개 나라에서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자유롭게 영어를 쓰는 인구만 해도 7억 5,000만 명을 넘는다. 한 나라 언어에 불과한 중국어와 비교할 수 없는 세계어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영어 배우기 열기나 외국서 배우고 돌아온 대학 교수들, 유학파 기술관료들이 거리낌없이 우리말 속에 써대는 영어를 새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국어의 운명은 암울하기만 하다. 이럴 바에야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말까지 나온다. 충남대 정과리(불문과) 교수는 『문화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외국어의 영향은 어쩔 수 없다』며 『영어가 압도적인 위세로 우리 문화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의 중심을 지키면서 밀려드는 외국어를 어떻게 국어의 망 속에 체계적으로 집어넣는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 언어제도의 채용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사이버 공간의 한글 파괴

「어솨요」 「안냐세요」 「방가」 「중딩」 「당근이지」는 잘 알려진 PC 통신의 대화방 전용 언어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중학생 ,당연하지의 뜻). 컴퓨터 활자판을 덜 두드려도 된다는 이유로, 통신 세계의 기분을 만끽하려는 네티즌들이 시작한 이같은 집단 언어의 언어 파괴는 이제10대들의 독특한 은어와 뒤섞여 걷잡을 수 없는 한글 파괴 현상을 빚고 있다. 「쏠탱」(미안) 「빠이룽」(안녕)은 그래도 들을 만 하다. 「주글래」(죽을래) 「마니」(많이) 「조아」(좋아) 등 발음나는대로 적는다는가, 「125」(이리와) 「0124」(영원히 사랑해) 등 숫자를 이용한 의사 표시도 있다. 하지만 「담탱이」(담임 선생님) 「빽」(선배) 「콩」(성관계) 「깔」(애인) 「야리」(담배) 「열라 깨졌어」(심하게 혼났다) 등으로 이야기가 번지면 문제가 조금 심각해진다. 청소년들이 너무 천연덕스럽고 쉽게 저속한 언어를 받아들이고, 또 유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나 대화의 원칙이 세워지지 않는 데서 사이버 공간의 한글 파괴나 토론의 문제가 생겨난다』 고 정과리 교수는 말했다. 공공통신망은 그래도 덜 하지만 인터넷의 뉴스 그룹이라든지, 게임방에서는 거친 말들이 쉽게 터져 나온다. PC 통신에서는 욕설이나 성적인 메시지를 남기는 이용자가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도 인격과 인격이 만나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올바른 말쓰기가 절실하다.

■이미지 범람 시대 한글의 운명은

외국어의 공격과 사이버 공간의 무분별한 문법 파괴라는 「내우외환」에 또하나 적지 않은 변수가 있다. 이미지의 시대, 주제어 하나로 인터넷에 올라있는 다종다양한 책과 문서를 검색할 수 있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이른바 「하이퍼 미디어」 세상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서와 글쓰기의 환경이 차원을 달리해 가고 있다.

디자인문화평론가 김민수씨는 『하이퍼 미디어는 특정 사회가 구축해 온 지식의 형태나 욕망의 체계에 도전하는 기회』라며 문화의 구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지의 보편화와 인터넷의 자유로운 정보 검색과 소통이 글쓰기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우리 언어 속에 깔려있는 남성중심이나 가부장의 권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표현들, 계층과 계급을 구분해 상·하를 나누고 한쪽을 멸시하는 언어사용태도, 인생의 낙오자들에게 덮씌우는 언어의 폭력에도 그런 변화의 바람이 절실한 것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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