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칠로 번쩍이는 싸구려 역사화(歷史畵)」금세기의 마지막이 된 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72)는 20세기를 이런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고 새로운 천년을 내다보는 작업이 세계 곳곳, 인간사의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라스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설의 형식으로 20세기를 정리했다. 마치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노벨상을 받을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듯 그가 올해 초에 발표한 소설 「나의 20세기」(독일어 원제 Mein Jahrhundert)가 금주중 민음사에서 번역출간된다.
「나의 20세기」는 1900년부터 1999년까지, 1년 단위로 그라스가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세계사의 사건들을 모두 100개의 장에 담았다. 정치적 비극, 문화적 사건, 학문적 발견에 따른 과학과 인간의식의 진보 등 한 세기 인류의 영광과 좌절을 보여주는 삽화로 이루어진 20세기의 벽화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각 장에 등장하는 화자의 시각과 목소리는 각각 다르지만 그들의 관점은 공통적으로 그라스의 비판적 문제의식에 맞닿아있을 수밖에 없다.
1933년. 어떤 해인가. 바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등장,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해이다. 그해 1월30일,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됐다. 이날 「가공할 진지성」을 얼굴에 담은 나치의 추종자들이 브란덴부르크 성문과 전승기념로를 당당한 종대로 행진해 지나고, 군중들이 그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는 전율이 인다
. 한 순간 나치의 등장을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보이는 운명의 의지」로까지 느낀다. 하지만 그같은 감동은 다음 순간 「싸구려 역사화」에 대한 인식으로 산산히 깨지고 만다. 그라스는 『음식을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올 때까지 입에 퍼담을 순 없지 않겠어』라는 스승의 말을 인용하며, 나치의 등장을 역사에 니스칠을 한 구역질나는 사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각 장은 원고지 20~30매 분량. 그라스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컬한 문체가 번득이고,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서도 앞을 내다보는 비판적이면서도 열린 자세가 빛난다. 독일어 원본에는 각 장마다 판화·조각가로도 활동한 그라스가 직접 그린 수채화 한 점씩이 딸려있다.
그라스는 대가다운 야심찬 기획의 이 작품을 올해 3월 발표했고, 마침 세기의 마지막 노벨상을 받았다. 세계 25개국에서 동시에 번역출간될 예정. 한글번역본은 안삼환·장희창(서울대)·김형기(순천향대) 교수가 공역(전2권)했는데, 일부가 민음사가 내는 계간 「세계의 문학」 올해 여름호에 소개돼 독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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