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현대사 다시쓴다](39) 10.26과 12.1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현대사 다시쓴다](39) 10.26과 12.12

입력
1999.10.05 00:00
0 0

-유신끝낸 총성 신군부집권 불러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 권위주의를 강화해 나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그동안의 정치_경제적 모순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 상황이 악화했다. 중화학 공업화에로의 과잉·중복 투자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가 야기됐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됐는데, 79년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무려 18.3%에 달했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소외감을 심화, 그들의 생존권 요구가 거세게 나오기 시작했다. 77년 출범한 미국 카터 행정부는 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이용, 한국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 했으나, 오히려 한·미 갈등만 증폭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야 세력과 야당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 생존권 투쟁을 확대해 나갔다. 72년 유신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됐으나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78, 79년은 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된 시기였다. 78년 동일방적사건과 함평고구마 수매사건 등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켰다. 12월 제10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득표, 공화당 득표율 31.7%를 앞질렀다.

79년 8월의 YH 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소규모 수출업체 YH 무역 노조의 여공들은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는데 경찰이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 내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 사망했다. YH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 갈등에 불과했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 세력과 유신 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기치를 내걸고 신민당의 새 대표로 등장, 박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했고,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했다. 또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했다.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김영삼 축출을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폭발, 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것이 유신 체제의 종말을 초래했던 부마사태다. 박정희 퇴진 등 정권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던 부마사태는 강경 진압에 의해 일단 해결됐으나, 대응 방식을 둘러싼 갈등 끝에 10·26 사태로 이어졌다.

당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부마사태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했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해 강경진압을 채택하자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했다.

10·26사태 직후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며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 헌법의 폐기를 결정했다.

10·26사태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김재규가 주장했던 「민주화를 위한 거사」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탄압해 왔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김재규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긴 했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며, 차지철과의 개인적 감정으로 표출된 우발적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와 사전모의는 하지 않았으며,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10·26 당일 궁정동 안가에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정승화가 연대를 거부, 쿠데타로 진행되지는 못했으며 결국 신군부가 집권하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다.

대통령 시해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살해했다는 것은 동양적 유교 윤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김재규 일당은 사형되고 10·26 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일단락됐다.

여하튼 10·26 자체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부마사태로 촉발됐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됐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살해된 후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참모차장), 장태완(수경사령관), 정병주(특전사령관) 등을 중용했으며, 10·26 사태에 직접 연루됐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했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10·26 사건의 전담 수사팀이었던 계엄사 합동 수사본부장 전두환 등의 신군부 세력은 군부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했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 연행 재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돈을 받는 등)을 발견했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서 당시 전두환도 500만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실패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 그를 통해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는 반란 주도 세력에 의해 장악됐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80년 5·17사건을 일으켜 제 5공화국의 권력을 획득했다. 5·17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였다.

■ 97년 재판부 판결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해 정당화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으며, 94년 5월 13일 정동년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됐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해 11월 비자금 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와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같은 달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 및 5·18, 비자금 관련 공판이 진행됐다.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 정부로서 내란 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며, 노태우는 『이 사건은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재판부는 97년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단정,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96년 12월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과 2,626억원이 추징이 선고됐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참고문헌

정승화,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87년)

최장집, 「군부권위주의체제의 내부모순과 변화의 동학」, (한국 정치-사회의 새 흐름, 86년)

성경륭, 「체제변동의 정치사회학」(한울출판사, 95년)

「제5공화국 정치비사 2」(중원문화, 87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편), 「12·12, 5·18 실록」(97년)

장태완, 「12·12 쿠데타와 나」(명성출판사, 93년)

여현덕, 「신군부 권위주의체제의 등장과 정치 갈등」(오름, 96년)

한흥수 외, 「한국정치동태론」(오름, 96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