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행정부가 공식 재조사에 착수했지만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아직 진실의 절반도 드러나지않고 있다. 육군 조사관들조차 『한국판 「킬링 필드」에는 여전히 풀리지않은 많은 의문들로 가득차있다』고 말한다. 노근리 철교 밑에 몰려든 피란민에게 최후의 발표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누구인가, 군지휘계통의 어느선까지 노근리의 진상이 보고됐는가 등등이 밝혀져야한다는 것이다.육군 진상조사팀은 이같은 의문의 답을 구하기위해 참전용사들로부터 노근리에서 일어난 「지옥같은 시간」에 관한 보다 상세한 증언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0여명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말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가 노근리로 피란한 수많은 민간인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는 것은 틀림없다. 당시 제7연대 병력은 후퇴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 퇴각중이었으며 피란민속에 북한군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제7연대 출신 일부 참전용사들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현장에서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챈들러 대위가 무전을 통해 연대본부와 사전협의를 했을 것으로 믿고 있어 더 윗선의 지휘계통, 예를 들어 제7연대와 제1기갑사단 지휘부의 관련여부가 관심이다.
그러나 현장 지휘관이었던 챈들러 대위는 70년 숨졌고 다른 대대 장교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챈들러 대위의 상급 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 대령은 88세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고 『학살사건에 대해 아는게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누구였던지간에 지휘계통을 따라 하달된 「포괄적 사살명령」으로 피란민에 대한 사살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기갑사단 복무규정은 피란민을 포함, 방어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당시 한국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던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나아가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전쟁을 총괄했던 2차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같은 불법적인 명령을 재가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군법 전문가는 민간인에 대한 발포명령이 명백한 불법이며 이런 명령을 따른 병사는 군사법원 회부감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사건에 연루된 미군 병사를 사건발생 50년 가까이 지난 현시점에서 형사처벌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게 또한 이들의 지적이다.
미국이 군대내 전쟁법 위반 사례를 상부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겨우 베트남 전쟁때부터의 일이다. 68년 베트남 밀라이촌 양민학살 사건 관련자들은 이 규정에 의해 처벌됐지만 노근리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은 지난 96년 전역한 미군이 복무중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으나 이 법률의 소급적용은 금지했다. 미국은 또 지난해 병사들의 전범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협정 서명을 거부한바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처벌보다는 진상규명이 더 중요하다며 특히 군상부에 의한 고의적인 은폐 여부를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군 최고검찰관을 지낸 하워드 레비씨는 『내가 왜 그 사건을 몰랐는지 이해가 가지않는다』며 『노근리 양민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중 발생한 유사사건을 군지휘관이 은폐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교는 부대에 불리한 사건에 대해 가끔 상부에 보고하지않는다』며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전범자가 미군일 경우 미국 여론이 전범자편을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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