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 7월 한국전쟁당시 미군이 충북 영동 노근리 부근에서 한국 양민을 살해한 `노근리 학살 사건'이 미 정부 공식 문서와 미군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AP 통신이 입수한 미 제1기갑사단, 육군 25사단 사령부 명령서등 미군 공식 문건 2건과 참전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7월 26일 당시 충북 영동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전 병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발발 5주째인 당시 북한군이 농민 옷차림으로 위장, 피란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을 침투하려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미군 병력들이 이에 따라 어린이, 여성 등을 포함, 피란민 수백명을 살해했다는 것.
또 참전 병사들은 노근리 학살 사건보다 희생자는 적었지만 7월과 8월 두차례이와 유사한 피란민 학살 사건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 육군 25사단장인 윌리엄 B 킨 소장은 7월 26일 야전 지휘관들에 보낸 명령서에서 한국 경찰이 이 지역의 민간인을 전원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또 제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서 "피란민이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고전선을 넘어오는 자에게 발포하라"고 말하고 여성과 어린이들에겐 주의를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제1기갑사단에 근무했던 6명의 참전 장병들은 민간인을 향해 발포했으며 또다른6명은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기관총 사수였던 노먼 팅클러씨는 " 우리는그들을 전멸시켰다"고 증언했다.일부 병사들은 `그냥 피하려했던 민간인'들에 대한발포를 거부하기도했다.
일부 참전 용사들은 그러나 노근리 부근 굴다리에 있던 피란민들로부터 총격을받았으며 사체들 사이에 위장한 북한군 병사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는적대적인 총격은 없었다고 밝히는 등 노근리 사건에 관해 완벽하고 상세한 설명은나오지 않았다.
또 발포 명령 지휘계통, 피란민으로부터의 사격 인지 오인사격 인지 여부, 발포명령 거부 병사들의 수 등 확실치 않은 부분도 많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은 사건 발생 시간,장소나 희생자중에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많았다는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참전 미군병사들은 피살자수가 100-200명 또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굴다리 부근에 있었던 참전 병사들은 사망자수를 2백여명으로 추산했으며 그밖에 상당수가 공군기의 기총소사로 숨졌다고 말했다.
노근리 학살사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생존자들은 300명의 주민들이 노근리 다리 부근에서 살해됐으며 또다른 100명이 미군의 공습으로 숨졌다고 말하고있다.
사건 발생 당시 일본에서 한국전선으로 3일전 투입돼 우왕좌왕한 것으로 알려진1기갑사단 7연대 2대대 소속 660명의 병력들은 북한군이 침공해내려오자 인근 마을에서 미군 병력에 의해 쫓겨내려오던 피란민들과 만나게됐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는 북한군이 농민 복장을 하고 피란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에 침투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7연대 소총수였던 허먼 패터슨은" 그들 중에 적군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한국인 생존자들은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노근리 부근에 도착했을때 미군들이 이들을 길에서 벗어나 철로위로 가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노근리 철로및 콘크리트굴다리 밑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인터뷰를 거절한 참전용사들도 있었으나 일부 참전용사들은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했다.
참전 용사들은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의 핵심 내용은 확인했다. 즉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노근리 철로밑 굴다리에 몰아넣고 이들중 거의 대부분을 살해했다는 것.
한국 생존자와 몇몇 참전 병사들은 미군기들이 피란민들이 있던 지역으로 갑자기 저공비행을 한뒤 기총소사를 하면서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일부 참전 병사들은 미군기들이 수마일 떨어진 북한군 포대를 공습할 계획이었으나 실수로 기총소사를 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AP통신이 입수한 미 공군 기밀 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조종사들이 위장한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에 있는 것으로 의심해 가끔 민간인들을 고의로 공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참전 용사인 텔로 프린트씨는 당시 자신과 다른 병사들이 미군의 공습을 받게돼피란민들과 함께 배수로로 몸을 숨겼다고 전하고 " 누군가 아마도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위로 참전했던 로버트 캐롤 예비역 대령도 상부로부터 민간이나 군인 그누구도 전선을 넘어오지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7연대 소총수들이 인근진지에서 피란민을 향해 발포했다고 말했다. 인근에 있던 25사단도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 적으로 취급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범죄 전문가들에 따르면 민간인들에 대한 이같은 사살명령은 명백히 불법이다.
캐롤 예비역 대령은 소총 중대들에게 총격을 멈추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 그들이 적인지 확신이 서지않았다"고 말했다.
캐롤은 이어 한 소년을 부상한채 공포에 떨고있던 한국인들이 모여있던 굴다리밑으로 한 소년을 피신시켰다면서 " 첫날엔 북한군이 없었다. 대부분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캐롤은 그리고는 그 지역을 떠났으며 그후의 일에 대해선 모른다고 했다.
한국 생존자들은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철로 굴다리 밑에 모아놓고 부근에 기관총 진지에서 사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참전 용사들은 중화기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뒤굴다리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유진 헤슬먼이란참전용사는 " 챈들러 대위가 `모두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챈들러 대위나 다른 핵심 장교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당시 대령으로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88)는 AP통신에 " 총격사건에 관해 알지못하며 그런 명령도 내리지않았다"고 말했다. 참전 병사들은 헤이어 대령이 당시 작전을 하급자에게 위임해 놓았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AP통신의 이같은 추적 보도 내용에 대해 군 역사가들이 군 문서를검토한 결과 공식 기록에는 그같은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으며 학살사건에 관한 육군당국의 공식 기록도 없는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미 육군당국은 한국 생존자들이 지난 97년 8월 한국정부에 제출한 청원서에서학살 사건과 관련, 미 제1기갑사단을 지목하자 제1기갑사단이 그 지역에 있었다는증거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기밀 해제된 군 문서를 토대로 병력 이동상황을 재구성한 결과, 제1기갑사단 4개 대대가 학살사건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노근리 학살사건과 관련,미군의 전투 행위에 관한 외국의 소송을 막아주는현행법에 따라 미 정부의 민사배상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 생존자들은 그러나 이 사건이 전투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노근리 학살사건의 전범행위 기소 역시 그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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