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상암산방(裳巖山房) 창 밖에는 은행나무 가로수에 나뭇잎이 무성하다. 관람객이 뜸해 한가하면 책을 보거나 전시품 목록을 정리하는데 그러다가도 무심히 창 밖으로 눈길이 가곤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이 며칠 사이에 한결 높아졌다.옛 책을 보다가 「인생부운(人生浮雲)」이란 글을 보곤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잠시 창 밖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그런 글을 보아도 그저 그러하거니 하였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그러한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한 치의 앞 일도 내다보지 못한다. 나는 남편과 40여년을 넘어 살았으면서도 그 사람이 내 곁을 먼저 떠나갈 줄 몰랐다. 워낙 과묵한 편인 남편은 평소에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남편을 사랑해서 살고 있겠거니 하였다. 때로는 그런 일로 투정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는 나를 보고 남편은 부질없는 말을 한다고 일축해버렸다.
남편은 가끔 내 이름과 자기 이름을 종이에 나란히 써서 가득히 메우곤 했다. 지금에야 그러한 것이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그러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 병원에서 내게 그동안 나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며 자기는 평생 오로지 나만을 사랑했노라고 하였다.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남편의 그 말을 잊을 수 있을까.
내가 평생 남편 시중을 드느라 힘들었던 것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남편이 떠난 뒤에도 나를 꽉 잡고 있으려고 했으니 참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남편이 떠나기 전에 그 말을 내게 해 준 것이 그만 고마울 뿐이다. 창밖 하늘에는 조각 구름이 흐른다. 「인생부운」이란 말을 생각하며 하늘을 본다. /이국강·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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