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 인권국가가 되려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인권국가가 되려면

입력
1999.09.28 00:00
0 0

『처음 서울을 찾았을 때 한국인은 외국인이라면 다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 서울을 방문한 후에는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한국인은 외국인만을 불신하고 싫어하지는 않는다. 자기네끼리도 서로 눈살을 찌푸리고 흘겨본다』한국을 안다고 생각하는 어느 외국인이 던진 「농담」이다. 그러나 그 때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한바탕 웃은 뒤 다같이 고개를 숙였다. 자괴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이 부족하다. 공격적이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깃털을 세우고 타인에 대한 전투태세를 갖춘다. 출퇴근길에는 난폭운전으로 상대방을 꺾고 누가 말을 건네면 무조건 먼저 퉁명스러운 말투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형성되는 이러한 수평적 관계는 그나마 낫다. 타인이 치고 들어오면 맞받아치고 반격할 수 있는, 거칠지만 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축으로 상하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수직적 관계는 다르다. 거기서 한국인의 몸에 배어 있는 공격적 기질은 인권침해를 낳는다. 약자가 맞받아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자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공격적 기질을 「밖」으로 폭발시키고 약자를 함부로 대한다.

한보사태 때였다. 국회청문회에서 그 「총(總)」회장은 서슴없이 직원을 「머슴」으로 불렀다. 자신이 던져주는 품삯을 먹고 사는 만큼 마음내키는대로

막 부릴 수 있다는 오만함과 무감각함 없이는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 재벌총수는 자신의 말대로 주변을 경멸하면서 권력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수많은 이의 자존심을 산산조각냈을 것이다.

남녀관계 역시 인권침해를 낳는 불평등한 권력관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대다수 직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잔심부름이나 하고 차나 끓이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다 회사가 기울면 「워크아웃」의 미명 아래 제일 먼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한국사회 내에서 성장의 과실을 가장 적게 본 「여성」이라는 약자가 환란의 시대에 가장 큰 희생의 몫을 짊어지면서 경제를 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이라는 폭력까지 감안하면 한국여성은 그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할만 하다.

한편 누구든 수사대상에 오르기만 하면 검찰은 순식간에 전화통화를 시간대별로 정확히 추적해내고 국세청과 은행감독원은 수많은 계좌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그러한 탁월한 과학적 수사능력의 이면에는 누구든 권력자에게 찍히면 사생활 구석구석까지 파헤쳐져 인격파탄자로 여론재판당할 위험성이 숨어있다.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인권국가』로서 우리가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병한다고 하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한국은 인권국가가 아니다. 민주화 덕분에 고문경찰은 사라지고 군부는 정치에서 손을 뗀 상황이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수많은 차별의 벽이 가정과 직장 내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사생활을 침범하는 권력이 건재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자신의 「인식」이다. 워크아웃시에는 부양가족을 거느린 가장인 남성한테 일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상당수 여성 스스로가 믿고 있다. 게다가 상사의 폭언과 성희롱이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이라는 주장을 「과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적잖다. 「거리」에서 키워온 공격적 기질때문에 웬만한 폭력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권국가가 되려면 동티모르 파병을 계기로 한국사회부터 뒤돌아보아야 한다. 내부에 존재하는 인권침해의 장벽을 걷어치우고 공권력의 횡포를 예방하는 과감한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국적 평화유지군 참여는 좋게 말하면 허영이고 나쁘게 말하면 위선밖에 되지 않는다.

/김병국·고려대교수·정치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