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기술(테크놀로지)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간다. 「생산적인」 학문이 위세 부리는 세태엔 이런 말도 가당할 것이다. 부모는? 자식 좋은 대학 보내는 것, 재테크로 돈 벌어 기분 좋게 소비하는 것. 중년의 남성들은? 권력과 출세의 욕망, 성욕의 끊임없는 배설…. 이런 것들은 현대의 신화다. 세기말을 관통하고 있는 한국의, 가장 개인적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집단적 모습이다.몇 년 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 신화를 소개하는 책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배운 듯 만 듯한 단군신화의 기억을 뒤덮던 그리스·로마 신화. 서양신화가 지배한 출판계였지만 최근 들어 인도와 중국 등 동양 신화를 깊게 파고드는가 하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소개하는 책도 눈에 띈다.
캠벨의 역저 「동양신화」
비교신화 학자로 이름이 높은 조셉 캠벨은 평생을 세계 곳곳에 전해오는 신화를 비교해 공통 분모를 발견하려 애썼다. 그가 쓴 책들은 벌써 여러 권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정작 그의 역작 「신의 가면」 4부작은 널리 소개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로 캠벨이 62년 썼던 「신의 가면Ⅱ_동양신화」(까지 발행)가 이진구(서울대 강사)씨 번역으로 최근 출간되었다.
캠벨은 신화들이 구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문화에 따라 어떻게 다른 양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이 책에서 살피고 있다. 중동(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 극동(중국, 일본)의 신화. 캠벨은 그 신화의 모습을 크게 4가지로 나눴다. 유럽은 인간 이성과 책임지는 개인, 레반트(지중해 동쪽) 지역에서는 자연적 계시와 신이 지배하는 하나의 참된 공동체, 인도에서는 위대한 내재적 텅 빔 상태에서의 요가적 통제, 중국은 천지의 도(道)와 자발적인 일치. 이러한 전통은 각각 프로메테우스, 욥, 눈을 감고 앉은 붓다, 눈을 뜨고 소요하는 현자가 상징한다. 그는 중동의 중심부에서 동서양 신화의 공통 분모가 발전하고 그에 따라 자기구원의 방식이 달라지는데 주목했다. 서양에서는 인간과 신의 분리를 강조한다. 죄받은 인간은 신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만물 안에 신성(神性)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욕망, 그 무명(無明)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 깨달음의 형식을 인도의 불교, 중국의 고대사상, 일본의 영웅과 차(茶), 티벳의 붓다를 통해 인상깊고도 해박하게 살피고 있다.
세계 각지의 신화 책들
세계의 영웅신화를 분석한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십수 년 전 이윤기씨가 우리말로 옮겼다가 최근 번역을 고쳐 민음사에서 새로 냈다. 다양한 신화의 모습을 한데 보여주는 「신화의 세계」(까치 발행), 그의 신화연구작업과 신념을 낱낱이 들려주는 인터뷰 「신화의 힘」(고려원 발행)도 출간되어 있다.
범우사가 대영박물관 출판부 책을 번역해서 내고 있는 「신화 시리즈」에서도 부담없이 몇몇 신화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집트 신화」와 「메소포타미아 신화」가 나와 있고 「아즈텍과 마야신화」 등 몇 권이 더 나온다. 현대지성사는 바이킹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북유럽 신화」를 최근 번역해 냈다. 마야인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마야인의 성서」(문학과지성사 발행)도 선보였다.
신화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개인적인 것이 그 무엇에도 앞서는, 「대량 소비」가 신화가 되어버린 시대에 집단이 지배하던 시대의 웅혼한 이야기 읽기가 아닐까. 조셉 캠벨은 그것이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회심리학자며 신화 연구에 큰 관심을 가졌던 칼 융이 뉴멕시코의 프에블로 인디언을 찾아갔을 때 이야기. 날마다 어김없이 정한 시간에 태양을 향해 춤 추는 그들에게 융은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태양은 우리의 아버님. 매일 기나긴 황도(黃道)를 걸어가는 지루한 여행의 반려가 되기 위해 춤을 추고 음악을 들려준다』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는 『프에블로 인디언을 원시인·미개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소시민 생활의 꾀죄죄한 신화에 매달려 일생을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최소한 태양이 안떠오를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이며 거대하다』고 말한다.
모든 신화는 우리 삶의 의미 체계다. 선과 악의 교묘한 조합과 투쟁, 삶의 고통을 이겨내고 그 가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모범. 세기말에 쏟아져 나오는 신화 서적들은 철저한 개인화, 속물의 신화를 벗어야 한다는 가볍지 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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