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 빛깔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년 가까이 지낸 한국 여자가 있었다. 고국을 떠나기 전 80년대 험난했던 시절에 학생운동의 선봉에 있던 한 남자를 사무치게 사랑했다. 하지만 수배에 쫓기던 그는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고 경찰에 붙잡혔다. 이제는 그를 잊을만했는데. 감옥에서 나온 그가 그녀를 찾는다. 헤어진 시간보다 지난 만남이 더 튼튼한 걸까? 지난 사랑 앞에서 여인은 방황한다.
또는 딸 빼고는 어린 아이까지도 여자로 보인다는 색병(色病)으로 이곳 저곳서 살림 차리고 살았던 칠십 노인의 인생기. 그가 베트남 근로자로 일하면서 현지처에게서 낳은 딸들은 이민 떠난 아버지를 찾겠다고 한국에 왔고, 다른 데서 낳고 데려와 키웠지만 가출해버린 아들이 대신 그들을 돌보다 죽는다. 뒤늦게 소식을 안 아버지가 화장(火葬)한 아들을 놓고 한탄할 때, 인생이란 참 염치 없기도 하지만 대속(代贖)이라는 성스런 모습을 지닌 줄도 알게 된다.
소설가 윤정모(53)씨가 오랜만에 내놓은 단편 소설집 「딴 나라 여인」(열림원 발행)은 작품마다 모자람없이 읽는 재미를 한껏 안겨준다. 8편의 단편을 읽는 즐거움은 서로 다른 독특한 일화들을 인상 깊게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에 재담의 묘미를 곁들인 빠른 언어 구사, 소재에서 풍기는 약간의 이국미까지 더하면 최근으로는 드물게도 「남이 들려주는 생경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소설 읽기의 흥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작품에는 한결같이 상처 받은 인생의 장면이 한자락씩 깔려 있다. 『난 말이야. 단풍구경을 오거나 무슨 놀이에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 가슴에 있는 상처가 보여』(「덫에 걸린 사람들」)처럼 뿌리 내리지 못하는 입양아의 고통(「탱고」), 어린시절 성폭행의 기억에 가위 눌린 인생(「볼록거울」), 유학 떠난 딸이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줄도 모르고 초로에 바깥의 새 사랑에 눈 뜬 남편과 여인의 피폐한 삶(「열꽃」).
윤씨는 『기존의 내 틀이나 의도를 벗어나 여태 내가 만나온 사람들, 그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한 번 옮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이번 소설집은 바로 앞서 낸 「빛」을 비롯한 5권의 창작집과 또 적지 않은 그의 장편과 대비된다. 여성, 노동, 분단, 농촌문제 등 사회성 짙은 예전 소설은 험난했던 현실에 지침없이 맞서고자 하는 강파른 작가 의식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들어 그 치열한 창작 정신은 한 뜸 쉴 시간을 찾았고(작가는 2년 전 영국으로 떠났다. 거기서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그린 장편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소설들이 나왔다.
하지만 소재는 달라졌어도 윤정모 소설의 시선은 늘 한자리라는 점을 이번 소설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뿌리 잃어버린 사람의 신산한 인생. 그것이 자기를 키워준, 하지만 약물에 중독된 서양인 양모(養母)를 보듬어 안는 화해로 결말을 짓든, 빈 껍질밖에 남지 않았다는 초로의 부인의 비참한 자기 확인으로 끝나든. 『사람에겐 사람이 있는 거야. 너마저 없었다면 내 빈 생애는 바다에 던져도 가라앉지 못했을 거야』는 호세아저씨의 말(「탱고」)처럼 작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단편들에서도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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