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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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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배려

입력
1999.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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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추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그 자체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떡과 과일이 풍성하고, 고무신 한 켤레라도 새 것으로 얻어신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청소년기의 추석도 나쁘지 않다. 차례를 대낮에 지낸 적도 있다. 집안내 남자들이 이집 저집 몰려다니면서 차례를 지내고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이 그만큼 걸렸다. 십촌까지도 집안내로 쳤다. 그 시절의 명절이나 제삿날은 격조했던 친척들이 모여 회포를 풀고 화해하는 날이었다.전후에 결혼하고 추석을 겪으면서 여자에게 명절이 결코 즐거운 날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전쟁때문에 나는 외딸이 돼버렸는데도 추석에 친정에 갈 수 없었다. 시댁은 맏이가 아니어서 차례를 큰댁에서 지내고 성묘가는 인원만도 이십여명이 넘으니까 나 하나 빠져도 자리도 안날텐데 기를 쓰고 챙기시는 시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친정에선 어린 조카 둘이서 달랑 차례를 지낼 생각을 해도 서글펐지만, 고인을 위한 의식 같은 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계신 어머니가 딸 기른 허망감을 지긋이 안으로 삭이고있을 생각을 하면 설움이 지나 분노가 복받쳤다. 우리 자랄 때만해도 효도를 인간 덕목의 으뜸으로 쳐서 부모 은공을 모르면 금수만도 못하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결혼과 동시에 낳아주고 길러주고 사랑해준 부모에 대한 정과 의무는 싹 잊어버리는 게 신상에 편하게 되어있는 여자라는 존재는 뭔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시집살이 하던 50∼60년대는 농촌 인구가 70∼80%를 차지할 때여서 지금처럼 귀향전쟁이란 말은 없었다. 도시로 나온 시골 사람은 입하나라도 덜려고 식모살이 내보낸 소녀들이 고작이었다. 나도 그런 처녀를 데리고 있었는데 추석과 구정 두차례 귀향시켜주는 것은 필수였다. 추석 선물을 챙겨 내려보내면서 내 신세는 그 애만도 못하다는 모멸감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대한 배려를 하도록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결렸다.

이제 내가 배려를 할 차례가 되고나니 아들이 없으니 내가 시어머니 되었을 때 어떻게 여자로서의 며느리 입장을 배려하리라 벼르던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딸들을 위해서도 배려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딸들이 스트레스 안받도록 안기다리고 안섭섭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감정없이 무심하게 명절을 넘길 수 있는 것은 딸들이 보고싶을 때 볼 수 있는 거리에 사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날짜나 시간이 겹치지 않게 신경을 써준 사돈댁의 배려도 있었으리라. 명절에 시골에서 서울 자식 집으로 올라오는 부모님 또한 자식에 대한 배려라 하겠다. 그러나 선조를 기리고 생존한 부모님께 효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아들 위주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시댁에 가서 차례 모시고 손님 치를 생각을 하면 명절이 되기도 전에 미리 몸살이 날 것 같고 연휴가 긴 것까지 끔찍스럽게 여겨진다는 며느리들이 늘어나는 것도 단지 일 하기 싫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면 당연히 그의 선조나 부모에 대해 효도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줄 아는 여자에 대한 왜곡을 못참아서가 아닐까. 지금같은 출산율의 추세라면 앞으로는 외딸과 외아들이 결혼하는 일도 전체 결혼의 반수에 가까워질 듯 하다. 양가가 다 같은 날 차례를 고집한다면 딸 노릇 며느리 노릇 사이에 끼어 여자들이 받을 스트레스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아들 가진 쪽의 지혜로운 배려만 있다면 부부가 따로 각자의 부모를 찾아가거나 여자는 시가로, 남자는 처가로 가는 교차 방문도 가능한 일이 되지않을까. 여기서 구태여 아들 가진 부모라고 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탓인지 아무리 옳지 못한 전통도 전통인 이상 일거에 쓸어버릴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완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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