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생활문화사 연구가 고대문화사연구는 역사의 피를 돌게 하는 작업귀퉁이 잘려나간 1910년대 한사슴표 사각성냥통 표지, 빛바랜 1940년대 이발소 그림, 59년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생산되기 훨씬 전인 1937년 제작된 사제(私製) 자석 라디오, 60년대 박정희 정부의 대대적인 출산억제 정책과 함께 무상으로 지급된 피임기구, 83년 금성사에서 만든 최초의 컴퓨터 모니터, 아직도 불을 당기면 금방이라도 빛을 발할 것 같은 1920년대 백동호롱, 요강, 참빗, 곤로 등등…. 김현철(45·근·현대 생활문화사 연구가)씨가 지난 15여년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수집한 것은 호사가들의 향수 취미를 자극하는 값비싼 「앤티크(Antique·골동품)」가 아니다. 「고물(古物)」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한세대 전만해도 우리 생활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던 물건들이다. 김씨는 이들의 존재 없이는 우리 근·현대 생활문화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바로 김씨가 「고물은 보물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유이다.
고물은 보물보다 소중하다
김씨가 고물수집에 눈을 뜬 것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했던 여성용 가방 「Tom & Judy」로 큰 돈을 벌었던 84년 무렵.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식 베클라이트 전화기와 제니스 라디오를 5,000원에 구입했다. 꽤나 멋스러워 매장에 진열했더니 「어디서 구입했느냐, 나도 하나 갖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래서 하나 둘씩 틈날 때마다 고물을 사들여 수리비만 받고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어느날 부산 번화가에 나가 보니 내 물건이 쫙 깔려 있더군요. 나한테서 꽤 많은 고물을 사간 후배가 수십배 이윤을 남기고 되판 것이었어요. 그때 고물수집도 돈이 되는구나, 깨달았죠』 사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부산·경남·북 일대 고물수집에 몰입했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고물의 가치에 눈길을 두지 않을 때라 손쉽게 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에는 아예 직원까지 고용, 정기적으로 고물을 싹쓸이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물 한 점을 구하기위해 시골 농가의 헛간까지 뒤지기도 부지기수. 98년까지 이렇게 「죽어라」 고물을 사들이기만 했고, 사들이는 대로 누이 소유의 건물 지하창고에 쌓아 놓았다. 제대로 사업이 안돼 고전하면서도 고물수집만은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고물이 무려 3만여 점.
고물덕에 TV프로그램 진행자까지
아마추어의 콜렉션 취미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으로 옛 물건들을 수집하게 된 계기는 98년 초. 생활 방편으로 운영하던 맥주집을 정리하고 늦깍이 근·현대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실증자료가 워낙 많으니 각 시대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공부가 재미있더라』고 말했다. 스승은 민족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었던 부산대 무용과 채희완 교수.
고물 덕에, 96년 3월부터 11월까지 부산 KBS TV에서 「김현철의 시간여행」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할 만큼 유명세도 누릴 수 있었다. 『정치·경제·사회사 중심의 근·현대사 연구가 역사의 골격을 짜는 작업이라면 생활문화사 연구는 그 골격에 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는 작업이지요. 공부를 하다 보니 고물들 하나하나가 우리 나름의 주체적인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자 실물증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물이 아니라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는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 삶을 규정해 왔던 그 「보물」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서구나 일본 것과는 명백히 다른 우리만의 풍요로운 생활문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볼 계획이다. 첫 결실이 98년 12월부터 99년 2월까지 부산 국제신문 사옥에서 열렸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전. 3개월 동안 6만여 명이 몰려, 난생 처음 고물 덕에 생활비도 벌었다. 올 8월 분당에서 개최한 「생활문화 100년,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나」 전에선 단지 1주일새 6만여 명을 동원했다. 지난 3~7일 아산에서 열린 제1회 한·일 청소년 영화제에서도 초청 전시회를 가져 큰 호응을 얻었다.
고물수집가에서 근·현대 생활문화사 연구가로
『고물들은 향수를 자극하는 단순한 「구경거리」로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저의 고물들을 통해 「아,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의 논리를 갖는 공산품과 생활 문화의 역사가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그는 밀레니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 및 미래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대규모 전시를 기획 중이다. 이를 준비하느라 아예 거처까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다. 『한때 스위스제 시계가 신분과시의 수단이 됐던 적이 있었죠. 지금은 자동차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문화」가 이를 대신하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옛 것들의 가치도 점점 올라가겠죠. 제 작업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루어질 것이고, 생활난도 좀 해결되겠지요』
황동일기자
dongil@hk.co.kr
*고물수집가 김현철씨의 보물1호/1910년대의 한사슴표 성냥 표지
「이 한사슴표 성냥은 국산품이요, 다른 성냥보다 불이 잘나고 장마 등이라도 불이 잘 나오니 귀공들은 아무 의심 마시고 팔아주시오. 귀국에서 처음 나왔고, 이와부터 사주시고 조선 팔도에 다른 성냥 많으나 이 한사슴표만 팔아주시오」(한사슴표 성냥곽 표지에서)
3만여 점에 이르는 김씨의 수집품 중 보물 1호는 1910년대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사슴표」 성냥의 표지이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공산품 자료라는 게 그의 판단.
진본은 따로 모셔두고 모사본만을 전시에 내놓을 정도로 그가 이를 아끼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광고의 중심 컨셉을 국산품으로 잡은 것을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치부해선 안됩니다.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된 게 1922년 무렵이니까, 10년 전쯤 벌써 국산품 애용을 주장한 셈입니다. 최근 쌀음료나 식혜 등의 유행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 것」이야말로 다가올 21세기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이 아닐까요』
당시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본 성냥과 제품 자체의 질(質)로 정면승부를 걸고 있는 점도 우리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당시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본 성냥은 배편으로 현해탄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습기를 많이 먹어 불량률이 높았습니다. 광고문안 중 「장마 등이라도…」 라는 대목을 강조한 이유이지요. 요즘 「우리 제품은 일본 제품보다 훨씬 더 품질이 좋으니 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될까요』 『성냥의 캐릭터 역시 닭표, 오리표, 학표, 매표 등 대부분 날개달린 동물을 썼습니다. 한사슴표 역시 날개날린 사슴이지요. 성냥 연기를 날개로 상징화한 것인데, 성냥 같은 하찮은 물건조차 영(靈)이 깃든 상품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기업들은 바로 이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쓰임새 좋고 디자인 좋은 물건 만들기에 앞서, 우리만의 생산문화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황동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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