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좋았던 시절이 있다. 때로 가슴 아렸던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 그런 때를 기억하는 단서들이 있다면 그 안에는 노래가 빠지지 않을 일이다.이미자는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이들에게, 부모의 어깨너머로 그 가락을 들었던 젊은이들에게 이미자의 노래는 하나의 이미지로 화석처럼 남아있다. 우리의 지난 삶과 뗄 수 없는 노래들. 노래마다 묻어나는 추억의 편린들.
이제 더 이상 이미자는 TV에서 쉽게 만날 수 없다. 이제 그 앞에 어떤 수식을 붙여야 할까. 「엘레지의 여왕」, 「트로트의 여왕」? 그것은 아직도 현재형일까? 59년 「열아홉 순정」으로 한국 나이 열아홉에 데뷔한 이미자(58)씨가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이미자의 공식 데뷔는 「열아홉 순정」(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을 내면서다. 이 노래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히트곡 중 하나지만 당시에는 그저 그런 반응이었다.
(「동백 아가씨」)
이미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백 아가씨」는 64년 발표됐다. 63년 연주인 정진흡과 가정을 꾸려 9개월의 임신부(그 때 낳은 아기가 가수 정재은)였던 그녀가 부른 노래는 그야말로 엄청난 흥행을 몰고 왔다. 김기 감독,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 아가씨」에 쓰일 노래를 의뢰받은 작곡가 백영호씨는 작사가 한산도씨와 밤을 새워 곡을 만들고 가수를 물색했다. 대성공. 10만장이 팔렸으니 지금의 밀리언셀러보다 못하지 않다.
(「흑산도 아가씨」)
30여 년간 800곡을 받은 작곡가 박춘석(朴椿石)씨와 만난 것은 65년. 「황혼의 엘레지」로 작곡가로 발돋움한 박씨나 「동백 아가씨」로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두 사람의 「새 스타」는 「흑산도 아가씨」를 시작으로 명콤비를 만들어갔다. 두 사람은 65년 「섬마을 선생님」을 시작으로 「기러기 아빠」 「눈물이 진주라면」 「그리움은 가슴마다」 등을 작곡하고 불렀다.
금지곡/ 동백아가씨,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이미자 만큼 금지곡이 많은 가수도 없을 것이다. 65년 「동백 아가씨」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공연과 음반제작이 금지됐다. 엔카(演歌)와 곡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일협상에 나선 정부로서는 국내 정서를 추스려야 할 입장. 그녀의 노래는 희생양이었다. 87년 8월 「유달산아 말해다오」 「기러기 아빠」 「꽃한송이」 「네온의 블루스」 「섬마을 선생님」 등 5곡이 한꺼번에 해금됐다.
이미자는 여전히 유효하다
노래가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면 이미자의 노래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 더 많다. 이미자의 노래 중에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같은 것이 있던가. 그럼에도 패티김 보다는 이미자가 더 넓은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바로 이런 고민은 여러 대답을 낳았다. 어떤 이는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노래했기 때문』이라 했다. 96년 한 방송사의 다큐에서는 그녀의 목소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기교없는 창법에 가늘고 고운 소리는 「타고난 목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미자 노래를 들을 때 맥박과 호흡 수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진다는 데이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노래를 들을 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느낌을 과연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힙합과 테크노의 시대, 이미자의 존재가치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소녀는 우울했다
1941년 7월 서울서 출생한 이미자가 두 살이 되던 무렵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어머니는 어린 그녀를 업고 강릉으로 떠났다. 이미자는 네살에 다시 친가로 옮겨와 살았고, 이후로 어머니와는 같이 살지 못하게 됐다. 『서커스단, 열차 안에서 노래를 불러 호구지책으로 삼았다』는 소문에 대해 그녀는 부인한다. 신화가 있는 스타는 더욱 멋져 보이는 법. 아마도 사람들은 이미자에게 뭔가 그럴듯한, 슬퍼서 더욱 운명적인 그런 신화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수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문성여고 졸업 무렵, 한 텔레비전 방송국 「예능 로터리」라는 노래 자랑 프로그램에서 나애심의 「언제까지나」로 예선을 통과하고,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으로 본심에 올라 1등을 차지했다. 가수 남일해씨가 그녀를 찾아왔다. 평론가 황문평씨가 작곡가 나화랑에게 스타로 한 번 만들어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데뷔 40년 맞은 이미자 기자회견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 보면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아 이제 여기 있네/…/ 괴로운 길도 슬픔의 눈물도 가슴에 묻어놓고/ 나와 함께 걸어가는 노래만이 나의 인생/…/ 언제까지나 나의 노래 아껴주는 당신 있음에」(신곡 「노래는 나의 인생」)
이보다 더 이미자의 노래 인생 40년을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즐거움도 많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많았다』고 했다. 가장 슬펐던 일은? 역시 노래를 뺏기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가수에게 없다. 65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가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였다. 3대 히트곡이었다. 『이제 이미자는 노래를 하지 말라는 얘기로 알아듣고 눈물이 났어요』
그러나 그를 가장 기쁘게 했던 것도 역시 「동백아가씨」였다. 파월장병 위문공연에서 「동백아가씨」를 부르자 너무나 좋아했던 장병들. 노래가 좋아 웃다가, 향수에 젖어 동백꽃이 떨어지듯 「후드득」 눈물을 흘리던 그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89년의 노래 인생 30주년(89년) 기념공연도 잊을 수 없다. 클래식만을 고집해 온 세종문화회관이 문을 열어 주었고, 그 무대에서 되찾은 노래 3곡을 마음껏 불렀다. 『22년 동안의 한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지요』
어디를 가도 자신의 노래를 기억하고, 따라 부르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팬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금까지 흘러온 세월에 감사한다. 트로트를 촌스럽게 생각하고 소외시키는 요즘 가요계가 안타까울 뿐이다.
『공연은 해도 음반은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네요』 8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미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어떤 정리 정돈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업성보다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도레미 레코드와 작곡가 백영호, 김희갑, 정풍송씨의 도움을 받아 새 음반 「이미자 가요생활 40년」과 월북작가 작품모음집인 「이미자의 해금가요」를 이번에 냈다. 10월 16~18일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전국 23개 도시 순회 공연도 가진다. 그동안의 가요생활에 얽힌 에세이집도 펴낼 계획이다.
새 음반에는 이씨가 직접 작사한 「내 노래 40년」(정풍송 작곡)이 실려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뜨겁게 받아온 사랑 진정코 잊을수 없어요.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로 노래는 끝난다. 「엘레지의 여왕」도 2년 후에 환갑의 나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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