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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풍경'99] 영어를 권하는 사회, 영어만 쓰는 기업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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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풍경'99] 영어를 권하는 사회, 영어만 쓰는 기업체도

입력
1999.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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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만 읽으면 끝나는 영문법」 「미국에서 살다 오셨나요」 「영어도 자존심이 있다」 「미쳤다고 영어를 어렵게 공부해」 「오대리, 영어 좀 하나」 「귀가 뻥 뚫리고 혀가 확 꼬부라지는 영어」 「동사를 알면 죽은 영어도 살린다」 「내게 영문법을 가르쳐 봐」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무슨 책 제목들인가? 잘 팔리는 영어학습 교재들이다. 내용이야 어쨌든 제목부터 튄다.

『이젠 죽기 살기로 해야겠다』 학생·직장인들은 일 년에 몇 번은 이런 생각을 한다. 젊은이들에게 『야망을 가져라!』는 말은 케케 묵었다. 차라리 『젊은이들이여, 영어를 배워라!』가 99년 지금에는 훨씬 실속있는 말로 들릴 것이다.

영어공부, 노소(老少)가 없다

28일 서울 서대문구 문화체육회관. 오전에 열린 생활회화 강좌에 10명 가량의 수강생이 초급 영어를 배우고 있다. 회갑을 눈 앞에 둔 홍청신(58·서대문구 연희2동)씨도 이 반의 「올드 스튜던트」 중 한 명. 『해외여행 갈 때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집의 아이들도 배워보라고 해서 용기를 냈다』고 말한다. 강좌에는 홍씨보다 1, 2살 많은 선배들이 두 명 더 있다. 서울 도심에는 한 블록마다 한두개씩은 있는 영어학원 외에도 구청의 구민회관마다 영어강좌를 듣는 주부들, 60을 넘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기업의 「영어 드라이브」는 갈수록 샐러리맨들을 옥죈다. 외국인을 임원으로 맞아들이는 기업이 늘면서 영어 회의는 흔한 일이 되었다. 이제 사내의 공식 의사소통에 영어만 쓰겠다는 회사까지 등장했다. 조기 영어교육 붐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기발한 교육, 눈에 띄는 교재

이제 회화나 듣기, 문법이나 독해 강좌 등 기본적인 학습법만으로는 안 통한다. 영어 강의나 교재가 튀고 보자 일색이다. 팝송을 듣거나,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고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구식. 발성연습 위주로 「강사 따라 고함 지르는」 희한한 수법까지 등장했다. 올해 초 문을 연 정인석 영어문화원은 「발성연습이 영어의 생명」이라며 두어 달 동안 영어 소리 내지르기만 가르친다. 미국식 발성이 몸에 배어야 청취도, 회화도 가능하다는게 정원장의 지론. 그의 영어성공법을 담은 「괴짜 강사 정인석의 영어 한(恨)풀이」라는 책까지 최근에 나왔다.

시중에 나와 있는 영어 교재들의 제목은 갈수록 튀고 있다. 심지어 영어공부를 하지 마라고 부추기는 영어교재까지 있으니까. 공통점은 쉽게 빨리 익히자는 것이다.

청취력을 높이려는 독학자들을 위한 대본 및 교재 시장도 부쩍 커졌다. 미국 TV의 드라마나 시사 프로그램을 녹음한 테이프와 대본을 제공하는 영어교재 공급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진기획은 최근 발간한 「굿 윌 헌팅」을 시작으로 해설이 담긴 영화 대본 12권을 비디오와 함께 발매할 계획이다.

인터넷으로 번지는 영어 학습

영어학습 열기는 인터넷에서도 뜨겁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영어학습 기법이 모두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영어강좌 사이트로 큰 인기를 누리는 곳은 「네오퀘스트 잉글리시 프라자」(www.neoqst.com).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을 나온 통역사들이 만든 사이트로 듣기, 문법, 독해 등을 모두 공부할 수 있다. 회원만 8만 명을 헤아린다.

영어청취 강사로 이름난 송강흠씨가 만든 「송강흠 AFKN」(www.songafkn.com)은 매일 주요 뉴스를 보고 듣는 것은 물론 자료를 내려받은 뒤 재생해 공부할 수 있다. 「이익훈 어학원」(www.ike.co.kr), 「다락원 영어공부방」(eng.darakwon.co.kr)에서도 청취, 회화 등의 여러 학습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신비로의 「박진우 사이버 AFKN」(www.shinbiro.com/fkn), 넷츠고의 「잉글리쉬 365」(go E365), 「예스 잉글리쉬」(go YESENG), 채널아이의 「사이버 어학원」(go LANG) 등도 인기가 높다.

영어 공용어화 초기 단계?

지난해 소설가 복거일씨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을 담은 책을 내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다. 경제주의의 승리냐,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느냐는 거창한 논쟁이 아니더라도 전자의 주장이 점차 현실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SK㈜가 3년 안에 회의나 결재 등 회사의 공식 의사소통을 모두 영어로 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외국인 이사가 포함된 임원 회의에서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영어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퇴출 0순위.

영어 못하기로는 우리보다 더한 일본도 사정은 비슷하다. 「임원회의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는 기업이 잇따라 나타나고, 최근에는 「영어 공용어론」까지 대두해 갑론을박이다.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과연 영어교육의 개혁 정도가 아니라, 중요한 의사소통을 영어로 해야 하는 것일까? 영어와 영어권 문화가 한국어와 한국문화와 서로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국인을 점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칠까?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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