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갈겁니까.』『예, 갑니다.』
이번 주초 김종필 국무총리는 지난번의 씨랜드 화재 참사로 아들을 잃고 자신이 받은 훈장을 국가에 반납하면서 뉴질랜드로 이민할 결심을 한 전 국가대표 여자하키선수 김순덕씨를 만났다. 김총리는 김씨의 아린 마음을 쓰다듬어 보려고 했지만 김씨의 단호한 이민 결심을 돌려놓지 못했다. 김씨는 반납한 훈장도 절대로 되돌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나마도 김씨를 비롯한 참사 유족들이 정부청사에서 아홉차례나 농성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총리면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 피해시민과 정부수반과의 단순한 대면이 아니다. 국민과 국가와의 역사적 대결이었다.
김씨가 나라를 떠나기로 모진 마음을 먹은 것은 화재 참사 자체의 분노뿐 아니라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에 절망하여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무엇하러 있는가.
무릇 국가의 존립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어느 한 국가의 국민이 되지만 그것이 비자발적이라 하여 국가로부터 탈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설 속의 어느 문서에도 도장찍은 적은 없지만 국민은 그 믿음 때문에 국가에 충성하면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그런데 우리의 한 국민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한다. 이것은 자유이민의 경우가 아니다. 도대체 한 국민을 자기 나라에서 못살게 만드는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참으로 우리나라는 야경국가(夜警國家)로서의 야경도 할 줄 모르는 나라다. 국민의 목숨 하나도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 나라다. 씨랜드 참사만 하더라도 사후 수습뿐 아니라 사고 예방도 나라의 책임이다. 건물 건축 과정에서부터 나라가 철저히 야경을 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주에는 성수대교 붕괴 참사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5년동안의 몸부림 끝에 자살했다. 이 딸도 나라가 죽인 것이고 아버지는 이민 대신 죽음으로 나라를 떠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면 나라의 모든 구조가 건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구조가 부실하다.
우리 국민은 정치는 없고 정쟁만 있는 나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은 없이 무조건 정권만 탈취하려는 나라의 국민이자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몇몇 사람의 권력욕이나 채워주자고 나라의 구성원이 된 것도 아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리는 국가가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생긴다. 나라가 무능하면 충성하기를 거부할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
김순덕씨의 이민은 이 거부권의 발동이다. 나라에 대해 국민이 내는 사표(辭表)다. 나라 노릇을 못하는 나라에 대해 국민 노릇을 못하겠다는 자퇴선언이다.
김씨의 훈장반납은 단순한 오기가 아니다. 훈장은 애국심의 표지다. 김씨는 어느 누구보다 애국한 국민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훈장을 탈만큼 나라를 빛냈다. 그럴때마다 가슴벅찬 「우리나라」였다. 눈물로 애국가를 부른 「나의 조국」이었다. 그 조국이 아들을 죽였다. 그 애국의 대가가 이것 이었던가. 무엇을 위한 애국 이었던가.
훈장을 줄만한 자격이 없는 부끄러운 나라로부터 받은 훈장은 부끄럽다. 어린 자식의 생명 하나도 지켜주지 않는 나라의 훈장은 영광이 아니라 모욕이다. 잃어버린 어린 생명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떤 설득도 어떤 위로도 부질없다.
『이민 갈겁니까.』
『예, 갑니다.』
사람이 마음 편한 곳, 거기 조국이 있다. 이민을 가고야 말겠다는 김순덕씨의 굳은 마음은 백번 옳다. 이런 나라니 온 국민이 다 이민을 가자는 말이 아니라 제발 온 국민이 다 사표를 내기 전에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해달라는 말이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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