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사(朝鮮公事) 사흘」이라는 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한 재상이 먼 지방의 수령에게 지시할 일이 생겨 하인에게 편지심부름을 시켰다. 그 뒤 사흘인가 지나 편지를 고칠 필요를 느껴 찾아 보니 하인은 아직도 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대답인즉 『조선공사 사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 지시가 바뀔는지 몰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관성 없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조선시대 정치를 알려주는 예화이다.지금 정부는 어떤가. 「조선공사 사흘」보다 더 심한 것같다. 각종 정책이 사흘은 고사하고 불과 몇시간만에 번복되거나 백지화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말썽이 생기면 없던 일로 지우개질 해버리고, 여론이 나쁘면 발언의 진의가 왜곡됐다거나 기자들이 잘못 보도한 것이라고 떠넘긴다. 여당의 정책위의장은 당·정협의를 거쳤다며 수익증권 환매제한조치 개선책을 발표하면서 당의 이름을 꼭 써달라는 주문까지 했다가 3시간이 안돼 취소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삼성자동차 처리문제와 대우처리문제에 대한 논평으로 물의가 빚어지자 없던 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교육부장관도 잦은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2000학년도 대입수능시험의 만점자가 4만명 수준인 5%가 나올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 2002학년도 수능시험성적을 최소자격기준으로 전형하는 대학이 12개로 확정됐는데도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해 혼란을 초래했다. 학생수 100명 이하 학교의 통폐합정책을 무리가 있다고 중지시켰던 그는 며칠 뒤 통폐합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 3,000억원을 집행토록 했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강행하지 말라고 전의 지시를 다시 백지화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공직자들의 잦은 실언과 번복으로 민심이 출렁이고 시장은 요동친다. 정부가 하라는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의 정부가 병행 발전시키겠다고 말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탕은 국민의 신뢰이다. 신뢰는 정책에 일관성 합리성 지속성이 있어야만 확보할 수 있다.
믿을 수 없는 정부는 따르기 어렵다. 그런데 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은 경쟁이나 하듯 준비없고 사려깊지 못한 언동을 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잃고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전문성과 식견이 모자라고 정책의 투명성과 공익성이 미약한 탓일 것이다. 씨랜드참사로 아들을 잃은 전 국가대표 필드하키선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절망한 나머지 훈장을 반납하고 이민을 가겠다고 말할 정도인데도 정부당국자들은 참 민심에 둔감한 것같다. 관직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 전근대적 존경과 신망이 무너지고 민주적 질서에 기초한 새로운 신망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스스로 행정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다.
강경식 김인호씨가 무죄선고를 받고 난 뒤 그들의 변호인은 매우 의미있는 말을 했다. 정책실패를 법률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법률적으로 무죄라고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같으며 정책책임자는 무한한 예지능력을 가져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국민은 정책담당자들이 역사와 민족 앞에 무한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획예산처가 직급별 행정경비를 산출한 결과 장관의 행정경비는 주당 44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시간당 9만7,000원이었다. 사무실 유지비나 전화료와 우편요금에 다소 차이가 있을뿐 각 부처가 대동소이한 수준이다. 장관 한 사람의 활동을 위해 1시간에 10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셈이다. 그렇게 돈을 쓰면서 한다는 일이 고작 이런 정도라면 문제가 아닌가. 장관들은 화장실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에도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일이다. 그들의 자리와 명예를 유지케 해주는 행정경비는 모두 국민의 세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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