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창비에는 새 천년을 앞두고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창비 편집부직원에서 출발한 44세의 고세현(高世鉉)씨가 사장을 맡은 것이 이런 변화를 상징한다. 고사장의 탄생은 전문경영인 체제의 출범이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지닌다. 변화는 지난 겨울 새로 영입된 편집자문위원의 면모에서도 확인된다. 김상환(金上煥·서울대철학과) 한기욱(韓基煜·인제대영문학과) 김종엽(金鍾曄·한신대사회학과)교수, 진정석(陳正石)서울대강사 등이 그들이다. 진보성향과 외국 문화이론, 대중문화 등 다양한 지식을 갖춘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소장학자들이다. 김영희(金英姬·한국과학기술원) 임규찬(林奎燦·성공회대)교수 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도 입장과 시각이 비슷하다.주간을 맡고 있는 인하대 국문학과 최원식(崔元植)교수는 『한편에서는 낡은 사회이념이 붕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가 브레이크없이 질주하고 있다. 혼돈이 계속되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문제 제기와 토론을 통해 대안을 마련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역량을 발굴, 창비의 기존 역량과 결합해야 한다』고 변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같은 변화는 폐간과 복간을 거친데다 소련과 동구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계기가 됐다.
창작과비평사는 계간 창비가 56호(80년 여름호)로 발행 중단된 뒤 단행본 발간에 주력했다. 특히 13인 신작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으로 시작된 신작시집 시리즈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은 신경림(申庚林) 조태일(趙泰一) 정희성(鄭喜成) 등 중견과 김정환(金正煥) 이영진(李榮鎭) 나해철(羅海哲) 등 신진급 시가 함께 실렸다. 김용택(金龍澤)시인이 섬진강으로 데뷔한 것도 시리즈의 하나인 「꺼지지 않는 횃불로」를 통해서였다. 85년에는 부정기간행물 형식의 「창작과비평」을 발간한다. 박현채(朴玄埰)의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1」과 성균관대 이대근(李大根) 교수의 「한국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는 사회구성체논쟁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부정기간행물임에도 불구, 폐간된 56호의 후속(57호)으로 표기돼 출판사 등록이 취소됐다. 당연히 문인 교수 출판계의 거센 항의를 불러왔다. 우여곡절 끝에 86년 창작과비평사가 아닌, 창작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87년 6월 항쟁의 결과 창비는 88년 봄 창작과비평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계간 복간호를 냈다. 하지만 창비 앞에 펼쳐진 세계는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문학에서는 민중운동의 현장과 연결된 많은 부정기간행물이 등장, 창비보다 훨씬 기동력있게 움직였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이 전성기를 구가했고 정파성을 앞세운 팸플릿과 잡지가 난무했다. 창비처럼 한쪽 주장만을 대변할 수 없던 잡지는 설 자리가 넓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창비가 70년대처럼 확실한 인맥을 형성할 수 없도록 했다. 소설에서는 김영현(金永顯) 방현석 김하기 김한수 신경숙(申京淑) 공지영(孔枝泳) 공선옥(孔善玉) 등, 시에서는 곽재구(郭在九) 도종환(都鍾煥) 고형렬(高炯烈) 최영미(崔泳美) 나희덕 정도가 이름을 얻었지만 이들을 70년대 개념의 창비 인맥으로 묶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손호철(孫浩哲) 윤소영(尹邵榮) 조희연 등 젊은 학자들은 예리한 글을 썼지만 단골논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이념적 논쟁이 사라진 시대. 비판적 지식의 지평을 넓혔던 창비는 전문경영인과 젊은 학자를 중심으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기대대로 새 시대, 새 세상에 대한 대안을 만들수 있을 지 지켜볼 일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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