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젊은 감독들은 선댄스영화제가 있어 행복하다. 그곳에서 독립영화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확인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키운다. 지난해 「슬램」과 93년 「낙원의 루비」로 각각 그랑프리를 차지한 마크 레빈과 빅터 누네즈 감독. 스타일과 정서는 다르지만 그들에게 영화는 「진실」이다. 21일 나란히 선보이는 두 영화가 그것을 확인해준다.슬램
워싱턴 D.C의 뒷골목 랩퍼 조슈아(사울 윌리엄스)는 아르바이트로 「잡초(마리화나)」를 밀매한다. 같은 패의 일원이 저격당하는 현장에 있었던 조슈아는 마약소지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간다. 흑인들이 거의 전부인 교도소에서 그는 글을 가르치는 교사 로렌 벨(소냐 손)을 만난다. 서로에 이끌린 두사람은 조슈아의 가출옥 이후 급격히 가까워지지만 그녀는 그에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영화는 흑인들에겐 일상화된 비극을 파헤친다. 청년들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하듯 마약을 판매하고, 소녀들은 몸을 판다. 로렌도 한때 창녀였다. 게다가 순순히 유죄를 인정하면 2년, 재판을 받으면 10년 씩 형을 살아야 하는 미국의 형법제도. 모든 부조리가 「순리」처럼 일상화된 현실의 돌파구로 영화는 내면의 소리를 끌어내는 「슬램」을 제안한다.
「슬램(Slam)」은 랩과 시를 합친 일종의 읊조리는 시로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는 힙합 문화이다.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는 점프컷(연속된 화면을 툭툭 잘라 필림 편집)과 핸드헬드 카메라, 그리고 힙합과 랩, 슬램이 어우러져 독특하고, 강렬한 청각·시각적 이미지를 전한다. 내면의 생각을 이끌어 읊어대는 로렌과 조슈아의 시 낭송 장면은 그들 내면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감옥에 돌아가라는 로렌과 「왜 나에게 어려운 것을 강요하느냐」는 조슈아의 격렬한 말다툼은 영화의 압권. 「날(生)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걱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뒤엉켜 서로에 대한 격분으로 변모된다. 티격태격하다 끌어안고 입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할리우드식 사랑 싸움이 아니다. 인간의 본연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 그 안에 있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모두 자신의 감옥안에 갇혀있는 죄수다. 그리고 우린 그안에서 시적인 순간을 찾아 헤맨다」. 먼 나라 미국의 불량 인생들이 읊조리는 시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오락성 ★★★, 예술성 ★★★★ /박은주기자 jupe@hk.co.kr
율리스 골드
세상에는 천재의 기발함이나 젊음의 분노와 열정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인생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긴 세월 상처와 비바람으로 켜켜이 쌓인 인생의 나이테. 거기엔 기교가 필요없다. 그저 살아온 세월의 흐름과 느낌대로 인간과 세상을 받아들이면 된다.
빅터 누에즈 감독의 「율리스 골드(Ulee's Gold)」는 또 하나를 가르쳐 준다. 배우에게는 나이와 시절에 맞는 역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였을때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젊은 시절 오토바이를 탄 「이지라이더」(69년)로 도로를 질주하며 기성질서에 저항했던 피터 폰다도 이제는 환갑을 코앞에 둔 나이(59세)가 됐다. 그가 말년에 「황금연못」을 찾은 아버지(헨리 폰다)처럼 플로리다의 작은 숲속으로 돌아와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이런 것들이야』라고 말한다. 그에게 지난해 골든 글로브와 뉴욕비평가협회는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양봉을 하며 한적한 시골에 사는 율리(피터 폰다)의 삶은 과거나 현재나 상처투성이다. 월남전에서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 강도죄로 복역중인 아들(톰 우드), 집나간 며느리(크리스틴 던포드). 두 손녀를 키우며 사는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꿀벌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정말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외면하지 않도록 만든다.
집으로 데려온 마약에 찌든 며느리와 숨겨놓은 돈을 뺏으려 가족을 협박하는 아들의 공범들과 부딪치고, 새로운 이웃이 된 이혼녀 코니(페드리샤 리처드슨)의 도움을 받으면서 율리는 자신의 「황금」인 「가족이란 울타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서로가 갈등을 딛고 미움과 불신을 씻어내듯, 그의 꿀따는 작업을 말없이 도와주는 손녀와 며느리의 모습처럼 조금씩 조용히 다가온다.
그것을 때론 관조하듯 멀리서, 때론 현미경처럼 정밀한 표정으로 담아내 관객들의 마음을 슬며시 적시는 영화. 인생의 깊이를 아는 감독과 배우에게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오락성★★★☆ 예술성★★★★☆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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