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누가 내 애인을 사랑했을까」96년 1월 6일 밤, 가수 김광석이 죽던 날, 나는 카페 한 구석에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2,500매가 넘는 소설 중에서 자그마치 2,200매를 방금 지우고 나왔노라고. 91년 5월 김귀정이 시위대에 깔려 죽던 날부터 4년 반을 매달렸지만, 오늘 문득 이 원고 뭉치가 소설도 뭣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약간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날의 자신감은 「총체적인 서사」보다 「정직한 관념」을 움켜쥐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왜 관념인가? 솔직히 우리 세대의 체험이란 6·25 세대의 체험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집시법을 위반하고 국보법까지 넘나들어도 박경리의 「불신시대」와 맞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량 미달의 「체험」을 놓고서 「후일담」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관념의 진폭을 논하는 자리라면, 홍세화도 지적했듯이, 해방 공간과 더불어 우리들의 80년대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사상이 동시에 향유되고 학습된 독특한 시기였다. 실천적으로 검증받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관념의 「순도」 면에서는 그 어느 시기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날부터 나는 우리 세대와 친숙한 여섯 개의 관념을 내 방식대로 버무렸다. 이 소설의 목표는 등장 인물과 사건들을 놓고 나보다 열 살이 많거나 적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기억도 체험도 보편적인 관념 아래에서 공유될 때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므로!
96년 1월 6일 밤, 나는 가수 김광석 역시 이런 의사소통을 고민했었다고 여겼고, 그래서 감히 그와 김귀정과 강경대가 죽음으로 남긴 자리를 내 방식대로 채우려고 했다. 그 방식이란 「치욕」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여러 번 되샘김질하는 것이다. 그리고 3년 만에 소설은 완성되었지만, 그들의 빈 자리는 여전히 크고 깊다.
소설가며 평론가로 활동하는 김탁환씨는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 「불멸」과 문학비평집 「소설 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 등을 냈다. 건양대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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