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호건(Ben Hogan)은 캐디 출신으로 19세에 프로에 입문해 US오픈 4회, US PGA선수권 2회, 브리티시오픈 1회, 마스터스 2회를 석권했다.49년 벤 호건은 피닉스 오픈에 참가한 뒤 애리조나에서 텍사스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가 운전하던 캐딜락과 버스가 충돌하는 사고로 골반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호건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폐로 흘러들어가 굳는 바람에 생명이 위독한 지경이 되었다. AP통신은 골프영웅의 사망 예고기사를 전세계에 타전했다.
다행히 수술결과가 좋아 호건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의사는 호건이 생명은 건졌으나 골프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호건은 병상에서 일어나 무서운 집념으로 골프에 재도전, 교통사고를 당한지 4년만인 53년 US오픈에서 네번째 우승을 거두는 대위업을 이뤄냈다.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 조지 홀 대위가 6년3개월동안 월맹군 포로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있으면서도 머리 속으로 고향의 골프장을 라운딩하는 상상의 골프로 끝내 제 정신을 잃지 않고 훌륭한 골프실력까지 갖추었다는 실화 또한 열망의 소산이다.
미국의 맹인골퍼 찰리 보즈웰 대위의 이야기는 골프에 대한 열망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의 한계가 무한함을 보여준다. 보즈웰 대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부상당해 두 눈을 잃었다. 전역한 보즈웰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재활교육으로 군에 입대하기 전에 즐기던 골프를 택했다. 온전한 사람도 아닌 장님이 골프를 한다니 주위에선 농담하는 줄 알았으나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골프에 도전했다. 눈물과 좌절의 나날을 견뎌낸 어느 날 보즈웰은 100이라는 스코어를 깼다.
이를 전해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의 전체 골퍼들 가운데 확실하게 100이란 스코어를 깬 골퍼는 불과 15%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85%의 골퍼들도 찰리와 같이 분발해주기 바란다」.
비록 캐디의 도움을 얻은 것이지만 나중에 싱글까지 칠 수 있게 된 보즈웰은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골프광인 봅 호프에게 심야 내기골프를 제의해 기권승을 거두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메시지는 우리나라 골퍼들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편집국 부국장 mjb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