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농민 비공식부문 취업… 노동운동 본격화 -우리나라는 50년대 말까지 가난한 농업국이었다.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농촌에 살고, 전체 취업자의 60% 이상이 농업 부문에 취업하고, 국민총생산의 40% 이상이 농업 부문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반면에 광공업 부문의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15%, 국민총생산의 8%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는 1, 2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면서 급속한 구조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농업사회에서 이른바 산업사회로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경제가 성장하면 농업의 비중이 낮아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 나라의 급속한 산업화는 국가의 성장전략 즉 극단적인 불균형성장전략에 의해 가속화됐다. 국민총생산과 공업부문은 급속하게 성장한 반면, 농업과 농촌부문은 심각하게 낙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62~66년)에 국민총생산은 7.7%, 광공업은 14.1% 성장한 반면에 농림수산업은 5.1% 성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성장률의 격차는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1967~71년)에는 국민총생산 10.5%, 광공업 20.3%의 성장에 비해 농림수산업 2.3%라는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결과 60년대 전반에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을 상회했던 농가소득이 70년에는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70% 수준으로까지 낮아졌다.
급격한 산업화와 농촌부문의 상대적 낙후는 농촌인구의 이농과 급속한 도시화를 초래했다. 농촌 인구의 이농과 도시화는 60년대 이후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고, 일제시대와 50년대에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50년대에도 연평균 약 10만명 정도의 농촌인구가 매년 순이농(이농인구_귀농인구)을 했고, 도시인구의 비율은 50년 18%에서 60년에는 28%로 높아졌다.
이농인구는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60년대 전반에 매년 19만명으로 급증했지만, 이 시기까지는 이농에도 불구하고 농촌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농촌인구의 자연증가가 이농에 따른 사회적 감소를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의 급격한 이농은 농촌사회의 기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60년대 후반의 순이농 인구는 매년 50만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그결과 농가인구는 67년 1,608만명을 최고로 68년부터는 급속한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농촌인구의 자연증가를 훨씬 상회하는 사회적 감소가 시작된 것이다.
농촌인구의 대량 이농은 급격한 도시화를 가져와, 도시인구의 비율은 70년에 41.2% 수준으로 증대했고, 그 후 도시인구의 증가 비율은 가속도가 붙었다. 60년대 후반 이후 우리나라 농촌인구의 감소와 도시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65~73년에 우리 나라는 연평균 6.5%의 도시인구 증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되던 브라질의 4.5%, 멕시코의 4.8%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이 시기의 도시인구 증가(연평균 6.5%)는 도시인구의 자연증가(2.2%)보다도 농촌인구의 이농(4.3%)이 주된 역할을 했다.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에서 삶의 기반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무작정 서울로 몰려와 빈민촌(판자촌)을 형성했다. 그러나 대도시 서울은 이들 농민들에게 판자촌을 허용하기에도 이미 만원이었다.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비롯해 판자촌 주민들은 강제 철거돼 69년부터 광주(지금의 성남시)로 강제 이주되기 시작했는데, 열악한 생활 환경과 극도의 불안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주민들의 불만은 71년 이른바 광주 대단지 폭동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시 빈민 문제의 심각성이 사회에 널리 알려짐과 동시에, 농촌의 피폐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문제로 비화돼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이농은 도시의 노동문제로 표출됐다. 도시로 몰려온 농민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도시의 비공식 부문에 취업했다. 도시 비공식 부문의 취업자는 60년 109만명에서 70년에는 227만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고,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5.5%에서 23.3%로 증가했다.
그무렵 우리 나라의 노동조건은 일반적으로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장시간 노동 등으로 매우 열악했지만, 도시비공식부문의 노동조건은 그 도를 더했다. 당시의 심각한 노동문제는 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자살이라는 매우 격렬한 형태로 사회의 전면에 부상되고 노동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전태일은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죽었다.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소수의 재벌들은 정부의 특혜와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착취를 통해 몸집을 비약적으로 불려갔지만, 농민들은 고도 성장의 그늘에서 삶의 기반을 잃고 도시로 무작정 상경하여 빈민촌을 형성하고 무권리 상태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세계 유례없는 고도성장은 세계 유례없는 농촌사회의 급격한 붕괴와 도시화를 가져왔다.
70년대에 들어와 박정희 정권은 한편에서는 사회 전체의 안정을 해칠 만큼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농촌문제를 완화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을 위해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의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자극하여 농촌의 외형적인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으나, 소득 증대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겉치장에 주력하여 과중한 농민부담과 소비 조장으로 농가 경제를 더욱 압박하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을 초래했다.
새마을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부주도의 권위주의적·관료주의적 대중동원 방식으로 추진됐기 때문에 농민들의 자조성·주체성·창의성의 신장을 저해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전통적인 자치 조직으로서의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지방자치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와해됐다. 70년대 전반에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던 이농은 새마을운동에도 불구하고 70년대 후반에는 다시 격화했고 그 규모는 60년대 후반의 대량 이농을 능가했다.
◆농가인구 변화추세(단위 천명)
연도 총인구 농가인구 비율(%)
1960 24,954 14,559 58.3 1965 28,705 15,812 55.1 1970 32,241 14,422 44.7 1975 35,281 13,244 37.5 1980 38,124 10,826 28.9
*[현대사 다시쓴다] 이농민들 광주대단지 폭동일으켜
- 이농민들 '내집 내땅 꿈' 짓밟히자 -
60년대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서울시는 이들 무허가 주택 주민을 집단 이주시켜 정착촌을 만든다는 정책을 세우고 69년 5월부터 70년까지 지금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경기도 광주로 12만명 이상을 이주시켰다.
그렇게 형성된 광주대단지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주민들은 도로와 배수시설이 없는 데서 천막을 치고 살았으며 일감이 없어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들은 쓰레기처럼 갖다버려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광주대단지의 토지 유상불하 및 가옥 취득세 부과를 발표하자 주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땅 투기 바람까지 불어 내 집 내 땅을 가지려는 희망이 짓밟히자 주민들은 71년 7월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토지 불하가격과 가옥취득세 인하를 요구했다.
여러 차례 산발적 시위에도 서울시의 반응이 없자 주민들은 8월 10일을 최후 결전의 날로 정했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대열에」라는 제목의 전단이 집집마다 뿌려지고 「배가 고파 못살겠다」「토지불하가격을 인하해달라」「일자리를 달라」는 피켓과 플래카드 3만여장이 준비됐다. 놀란 서울시는 주민과 서울시장의 직접 면담을 약속했다.
71년 8월10일 오전 10시, 광주대단지 주민 3만여명이 빗속에서 서울시장을 면담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1시40분이 되도록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주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주민들은 관용차, 경찰차, 성남파출소 등을 불태웠다.
이들중 600여명은 버스와 트럭을 뺏어타고 서울시청으로 향하다가 긴급 투입된 서울시경과 경기도경 소속 진압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이에 서울시장은 주민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발표, 오후 5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폭동이 가라앉고 주민들은 해산했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했고 주민 23명이 구속됐다. 학생이 아닌 일반인 시위로는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대단지의 비참한 실상이 사회에 알려지게 됐고 이후 각종 민원성 소요가 폭발했다. 광주대단지는 73년 성남시로 승격됐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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