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 김원룡(1922~93)은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잡은 거목이다. 생전에 3권의 산문집을 내고 2번의 문인화 개인전을 열 정도로 다재다능한데다 두주불사의 호방함까지 갖춰 많은 후배들이 문하로 몰려 들었다. 오늘날 이들은 삼불학파로 불리는 인문학계 최대의 학맥을 형성했다.삼불학파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출신이 중심인 관학파로 국·공립박물관과 문화재위원회에 폭넓게 포진해 있다. 이들과 고고학계를 양분했던 손보기 단국대 박물관장의 연세대 사학과 학맥이 주로 학자인 것과 대비된다. 삼불학파의 이같은 성격은 김원룡의 삶과 맞닿아 있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 있다가 미 뉴욕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평론가적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 고고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양의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학자였다. 덕분에 58년 문화재위원, 70년 국립박물관장에 오르며 이후 백제역사를 재조명하게 한 충남 공주시 무녕왕릉(71년), 남한에 전기구석기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80~83년)등 수많은 발굴을 통해 한국 고대사를 완성하다시피 했다. 동시에 그는 61년 국내 최초로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를 개설하고 73년「한국고고학 개설」, 87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개설서인「한국미술사」를 집필, 고고인류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삼불의 제자들은 60년대말부터 고고학 미술사 인류학 등 세 갈래로 세분화한다. 서울대에서도 고고인류학과가 73년 고고학과와 인류학과로 나눠지고 83년 고고학과가 고고미술사학과로 바뀌었다.
고고학 분야로 나간 제자는 임효재 서울대교수, 김병모 한양대교수, 손병헌 성균관대교수, 정영화(이상 61학번)영남대교수,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이상 62학번)주프랑스 문화원장, 최몽룡(64학번)서울대교수, 김종철계명대교수, 이건무 국립박물관 학예실장, 이백규(이상 65학번)경북대교수, 한영희(68학번)국립박물관 고고부장, 이선복(75학번)서울대교수등이다. 임효재교수는 강원 양양군 오산리유적을 발굴, BC 3000년께로 추정되던 신석기의 기원을 BC 5000년경께로 끌어올렸고 정영화교수는 구석기의 용어문제를 정리했다. 또 한때 전남대에 있었던 최몽룡교수와 김종철 이백규교수는 지방의 유적을 중점발굴, 고고학을 전국화했다.
김원룡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술사를 개척했다. 오늘날 역사기행의 대중화도 그의 미술사 정리가 없었다면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는 고고학 분야에서 87년 은퇴때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한데 비해 미술사는 안휘준(61학번)서울대교수를 길러내 80년대부터 2인자의 역할을 하게 했다. 김영원(72학번)공주박물관장, 김재열(73학번)호암미술관 부관장등 70년대 학번 제자들도 미술사분야에서 맹활약중이다.
인류학분야로 나간 제자는 권이구(61학번·작고)영남대교수, 이종철(62학번)국립민속박물관장이 대표적인 인물. 권교수와 이관장은 각각 우리나라 체질인류학과 민속학의 대가이다.
삼불학파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인맥이 김원룡이 국립박물관에 있을 때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윤무병 한병삼 전 국립박물관장과 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난영 동아대교수등을 들 수 있다.
삼불학파는 97년 삼불 4주기 행사에서 77년 그가 「백제고분」이라고 결론내린 서울 구의동 유적을 「고구려 요새」로 수정했다. 제자들은 당시 『무녕왕릉 발굴을 졸속이었다고 자평한 삼불이니만큼 후세가 역사를 바로잡는 모습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불과 후학들의 올곧은 학자정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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