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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베트남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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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베트남 참전

입력
199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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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 31만명 '젊은피'대가 베트남특수 누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맥나마라는 「회고록」(In Retrospect)에서 베트남전을 미국의 엄청난 잘못으로 규정했다. 주된 잘못으로 도미노 이론, 베트남 민족주의 과소평가, 베트남 역사문화에 대한 무시, 군사기술에 대한 과신 등을 들었다. 그는 미국이 63년에 베트남에서 철수했어야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참전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李承晩)정부때부터 박정희(朴正熙)정부때까지 끊임없이 미국정부에게 베트남전 참전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군의 파병제의를 수락하지 않았으나 65년 확전방침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하게 됐다.

존슨대통령은 파병의 대가로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한국은 미국이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 그 해 10월 첫 전투부대를 파견했다.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의 군사부담 및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국정부는 참전을 대가로 미국의 경제군사 원조를 이전보다 많이 받게 됐다.

이리하여 65년부터 73년까지 연 31만명의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목표아래 베트남전에 참가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최대 규모였던 해는 미국과 한국 모두 68년이었는데 당시 미군은 약 55만, 한국군은 5만명 정도 주둔했다.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은 약 5,000여명의 전사자를 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 후유증, 고엽제 피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왜 한국 젊은이들이 남의 땅에서 전투를 벌였는가? 또 베트남 참전이 한국사회에 가져온 영향은 무엇일까? 정부는 기본적으로 자유세계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또 6·25 때 미국 등 자유세계에 진 빚을 갚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파병 결정 당시 야당으로부터 반박됐다.야당에서는 대리전, 청부전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파월 한국군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에서도 전개됐다. 미상원외교위원회의 「안보협정 및 해외공약분과위원회」의 청문회, 이른바 「사이밍턴 청문회」는 70년 2월에 한국군의 파병에 대한 질의와 토론을 벌였다. 미국이 한국의 파병에 대해 경제적 대가와 보상을 지불한 것이 쟁점이었다. 즉 파월 한국군에 지급된 전투수당을 문제삼아 전투수당을 받고 참전하여 전쟁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용병(傭兵)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몇년 전에는 우리나라의 교육부 장관이 용병론을 제기했다가 장관직을 사임한 적도 있다.

용병론을 불러온 전투수당을 보면 한국군의 전투수당은 다른 군대에 비해 매우 낮았다. 미국군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으며 필리핀과 태국군 전투수당의 5분의 1이었다. 또 한국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병사들의 전투수당은 참전국 병사 가운데 가장 낮았으며 베트남 병사의 것보다도 낮았다. 전투수당 그 자체는 낮았지만 파병이 한국의 경제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에서 보듯 브라운 각서가 체결된 66년 이후부터 베트남 특수는 급격히 성장했다. 이 각서는 한국군 파병의 대가로 한국 기업과 한국 노동자의 베트남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대한경제원조 증대, 한국상품 구입확대등을 보장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경제효과 외에도 한국상품에 대한 미국시장의 개방은 수출주도형 공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베트남 특수란 월남으로의 상품수출과 파월군 관계의 서비스로 구성된다. 베트남 특수의 구성을 보면 물자조달이나 상품수출보다는 무역외 수지가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기술자와 군인들의 송금, 건설 및 용역의 군납 등이 베트남 특수 총액의 70%를 차지했다.

한국기업들은 파병을 계기로 상사, 건설, 서비스업 등을 중심으로 남베트남에 진출했다. 한진상사, 경남통운, 현대건설, 한양건설, 공영건설 등이 대표적 기업이다. 한국의 노무자와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진출했다. 이들은 한국기업과 남베트남내 외국기업에서 일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한국의 최대 인력시장이었다. 베트남 특수로서의 인력수출은 실업문제 해결과 외화획득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었다. 남베트남에 대한 상품수출도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나가와(神奈川)대학의 박근호(朴根好)박사의 계산에 따르면 65~70년 대베트남 수출은 연간 한국 수출총액의 8.5%를 차지했다. 남베트남은 미국, 일본에 이어 세번째로 큰 수출시장이었다.

에서 보듯 베트남 특수는 한국의 GNP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베트남 특수를 전체 수출총액과 견주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67년에는 수출 총액의 47.3%에 상당한다. 외환보유액이나 무역외수지의 규모와 비교해 보아도 베트남 특수의 중요성이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요컨대 베트남 특수와 미국의 원조, 대미 수출시장의 개방 등에 힘입어 한국경제는 6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을 할수 있었다. 박근호 박사의 지적처럼 한국의 경제발전 및 공업화 도약을 위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는 베트남전쟁이었다.

베트남 특수로 이룩된 경제발전은 박정희 정권의 대중적 지지를 강화해주었다. 한편 베트남 참전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안정에 기여했다.

미국은 전쟁의 동반자로서 박정희 정부를 강력히 지지하게 됐고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반공주의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국내정치를 장악했다.

더욱이 60년대 후반 북한의 무장간첩 남파로 인해 안보이데올로기가 실질적인 힘을 얻게 됐다. 베트남 전쟁 및 한국군의 참전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최근까지도 금기시됐던 것을 보면 베트남전쟁과 안보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 참전은 당연히 한국사회의 사상적 경직을 가져왔다. 사상의 경직때문에 우리는 상대방 즉 베트남측의 상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없었다. 서방의 시민단체들이 한국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고발하고 용병이라고 비난할 때도 우리는 귀를 막고 있었을 뿐이다. 베트남인들은 국민복지증대와 경제발전이 급하기 때문에 전쟁의 아픔을 잊으려 하고 굳이 토론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의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베트남과 서방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소설 「전쟁의 슬픔」(바오 닌)은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의 보통 국민들에게 천년동안 지속될 만한 고통과 아픔을 주었다』고 말한다.

다음은 8월3일자 ‘농가인구감소 시작과 도시화’

◆한도현 韓道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회학과 조교수

▲약력

△서울문리대 사회학과 ,서울대 사회학과 석박사

△국민대 서울대 강사

△미국 하버드대 페어뱅크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미국사회학회 회원

△논문 및 저서 「현지화 경영과 노사문제: 베트남내 한국계기업」 (생각의 나무·99년) 「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와 이승만정부의 붕괴」(오름사·98년) 「베트남전쟁을 다루는 세가지 입장」 (서울대 국제지역연구·98년)「베트남의 시장지향적 개혁과 소득분배의 변화」 (농촌사회·99년)

▲연구자료 및 참고문헌

△박근호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水書房·93년)

△이기종 「한국군 베트남참전의 결정요인과 결과연구」(고려대박사논문·91년)

△이삼성 「20세기 문명과 야만」(한길사·98년)

△이영희 「전환시대의 논리」(창작비평사)

△홍규덕 「베트남 참전의 결정과정과 그영향」(정문연 현대사회연구소 제3회 국내학술회의 발표문)

△Hong,Kyudok. 「Unequal Partners:ROK_US relations during the Vietnam War」(노스캐롤라이나대학 박사학위논문·91년)

△Yi,Kil J.「Alliance in the Quagmire:The United States, South Korea, and the Vietnam War, 1964~1968」(뉴저지 주립대 박사학위논문·97년)

연도 특수총액 대(對)GNP 대수출총액 대외환보유액 대무역외수지 (100만달러) (%) (%) (%) (%) 65 19.5 0.6 11.1 14.1 15.5 66 61.1 1.7 24.4 25.9 25.5 67 151.3 3.5 47.3 43.6 40.3 68 168.6 3.2 37.0 43.5 39.7 69 200.4 3.0 32.2 36.5 40.3 70 204.6 2.6 24.5 35.1 41.7 71 133.3 1.5 12.5 24.9 27.4 72 83.2 0.8 5.1 12.0 14.4

*[현대사 다시쓴다] 문화 속의 베트남전쟁

 - 혼혈아.고엽제 후요증.인간성파괴… 소설.영화서 고발 -

베트남전쟁, 한때 금기였다. 아직도 상당부분 금단의 영역 속에 숨어있다. 자유 수호라는 명분으로 참전했건만 미국 유럽 등 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가한 한국군은 용병이며 미군의 대리자』라는 비난이 터져나올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나 발언조차 박정희정권의 안보·반공 이데올로기 덫에 걸려 허용되지 않았다. 80년대 들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본격 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등 문화 분야에서는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다루었다. 대부분 월남전 참전 작가들에 의해 작품화 한 소설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와 용병으로서의 자괴감을 표출하고 있다.

박영한은 『70년 9월부터 72년 9월까지 참전한 내 청춘의 기록』이라며 78년 소설 「머나먼 쏭바강」을 발표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지켜나가는 병사와 비인간화 하는 군인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93년 SBS에 의해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67년 통역병으로 참전했던 작가 안정효는 69년 구상과 집필을 시작한 「하얀 전쟁」을 93년 발표했다. 전쟁 상흔으로 정신병자와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버린 참전군인들의 현 주소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92년 정지영 감독에 의해 영화화했다.

「탑」 등 단편 소설을 통해 간간히 월남전을 다룬 작가 황석영은 장편 「무기의 그늘」에서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 충격을 주기도 했다.

94년에 발표된 두 편의 소설, 박충훈의 「강물은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와 안혜숙의 「고엽」은 고엽제 문제를 다루어 베트남전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는 점을 고발했다. 2,000여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그렸다.

대부분의 작품이 피해자 입장에서 서술했다면 참전 해병용사인 김창동의 「9343099 WAR」는 한국군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관점에서 서술된 소설이다.

서윤모 감독의 94년 영화 「라이 따이한」은 월남전의 또 다른 뒷모습인 한국군과 베트남 여자 사이의 혼혈아 문제를 담고 있다. 이창훈과 영화 「인도차이나」의 주연인 베트남 여배우 린당 팜이 출연했던 「라이 따이한」은 한국청년과 아버지를 증오하는 한 라이 따이한 처녀의 애절한 사랑을 통해 지금까지도 아픔으로 남아있는 혼혈아 문제를 드러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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