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연구기관에서 기업경영에 실패한 재벌총수의 퇴진문제를 제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이 재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도록 설립한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지금까지 항상 재계를 감싸는 논리와 입장을 전개해 왔다.그러던 한경연이 실패한 경영진은 퇴진해야 한다는 논리를 대기업의 자기변혁 차원에서 제시했으니 놀랄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재계가 드디어 자기변혁에 나서는구나 하는 긍정적 기대를 갖고 후속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나 한경연은 하루만에 후퇴했다. 『한경연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일부기업이 거세게 반발하자 『진의가 왜곡된 것』이라고 물러섰다. 「실패한 경영진의 퇴진」이라는 말은 전문경영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부연설명도 뒤따랐다.
대기업들이 만든 연구기관인 만큼 대기업이 싫어하는 주장을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미묘한 때다. 마침 삼성차의 청산과 경영인 책임문제가 현안이므로 한경연의 이러한 주장은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만도 하다.
사실 실패한 경영진의 퇴진문제는 새삼스러운 주제가 아니다. 한경연의 문제제기 여부를 떠나 재벌개혁의 중요한 항목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환란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재벌개혁의 초점이 바로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과거 경영풍토를 깨기 위한 것이었다.
1년반이상 재벌개혁에 매달려온 마당에 결정적인 경영실패가 만천하에 드러난 재벌총수들에게 여전히 종전처럼 면책특권을 준다면 결국 「개혁 따로, 현실 따로」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실패경영진의 퇴진이 재계안팎에서 당연시돼야 한다. 책임경영, 투명경영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하는 시대에 실패한 경영진이 퇴진하지 않는다면 회사 안팎, 나라안팎에서 그 기업인이나 기업이 제대로 대접받기 어려울 것이다. 삼성차의 경우에도 이건희회장의 거취가 은연중에 나라안팎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연의 입장번복은 여전히 국내 재계가 변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이 부분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재계는 계속 과거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재계는 이제라도 한경연이 모처럼 「밥값」을 했음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또 무엇이 진정으로 대기업을 위하는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입맛에 쏙 드는 소리,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소리로는 당장의 개혁파고를 헤쳐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새천년의 생존전략을 얻어낼 수 없다. 재계는 스스로의 자존(自尊)을 위해서도 실패경영진의 퇴진을 새 전통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돼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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