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권의 인기가 날로 급락하고 있다. 요샛말로 바닥을 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정권의 하향곡선에 비해서도 그 추락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웬일인가. 미국의 클린턴은 그 유명한 섹스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인기급락을 피했으며, 독일의 슈뢰더와 영국의 블레어는 날로 상한가를 갱신하는 중이다.우리에겐 지지도 하락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지난 정권에 비하면, 민심(民心)을 흔드는 대형사고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았냐고 항변할 수 있다. 또는, 망가진 경제를 복구하느라고 민심을 달랠 여력이 없었다고 호소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경제복구의 과정에서 치른 대가를 돌려주지 못하는 정부의 기업편향 정책과, 통치자와 권력집단이 국민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 정권의 탄생을 환호했던 사람들이 맹렬한 비난자로 돌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면서 나는 서글픔을 느낀다.
경제회복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진정 바랐던 것은 고도성장국가로서의 자존심 회복이 아니었다. 「어떤 경제」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기적임을 보도하는 국내외 유력언론의 시선 속에는 그 질문이 빠져 있다.
국민들은 지난 시대의 악몽이 제거되지 않은 경제성장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선한 예감, 그것이 감지되지 않는다. 최근 정부가 서민과 중산층대책을 서두르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인데, 정책철학의 빈곤과 정책입안의 폐쇄회로 때문에 바닥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정책의 부작용이 커지면 개혁은 개악이 된다. 김영삼정권의 개혁은 너무 소극적이어서 목적달성에 실패했다면, 김대중정권은 너무 지나쳐서 부작용을 양산한다. 원칙없이 큰 쪽으로 몰아주자는 빅딜은 8개월만에 무산되었다.
추진과정에서 여론은 철저하게 차단되었는데, 전면백지화라는 포기선언 앞에서 그동안 정부가 발령했던 많은 결단의 엄포들과 빅딜을 정당화했던 화려한 수식어를 기억하기조차 무색하다. 말도 많았던 교원정책은 요즘 심각한 후유
증을 앓고 있다. 교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망가뜨린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퇴출예정인 사오십대 경력자를 기간제강사로 다시 채용하여 인력부족을 해결하려 한다. 인적자본의 손실을 포함하여 부작용 해소비용이 만만치 않다.
중등교사들은 새롭게 도입된 수행평가 레포트 더미에 깔려 있으며, 학생들은 학과시험 외에 보고서작성의 짐을 더 안았다. 농민들은 두 배로 인상된 의료보험비가 버거워 피할 방법이 없느냐고 자주 묻는다. 협동조합 통폐합에 반대하여 축협직원들은 결국 거리로 나왔다.
통폐합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정부가 이들을 집단이기주의로 공박해도 바닥정서는 그것이 아니다. 급기야는 이 사회의 지식인 집단인 대학교수들이 거리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현장을 무시하는 정책, 서민정서를 모르는 정책관료, 새로운 사회를 꿈꾸지 않는 정치때문이다.
정부부처들은 통치자의 의중을 먼저 읽으려는 충성경쟁을 중단해야 한다. 국민들이 정책개발과 예산투입 과정을 소상히 알게 된다면 아마 놀라움과 분노를 감추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정책들은 과장급 이상의 똑똑한 몇몇 관료들의 책상에서, 국책연구기관의 몇몇 연구원들에 의해 입안되어, 역효과를 검증할 새도 없이 곧 실행단계로 넘겨진다.
부처간 정책충돌의 가능성도 안중에 없다. 그 결과, 백화점식 정책메뉴에 혈세가 새는 것이다. 정책홍수의 조절기능을 담당할 사령탑은 부재하고, 부작용과 예산낭비의 책임소재도 불명확하다. 그들이 바닥정서가 무엇인지 알 리 없다.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통치자가 위기극복의 공적(功績)을 하소연한들 돌아서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송호근·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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