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지난 봄 불구덩이 속에 아들을 잃고 울부짖던 칠십 노모의 절규가 아프게 되살아나는 아침이다. 이년 전 봄, 아이 아빠를 떠나보냈을 때처럼 살아 남은 우리 형제들은 노모 앞에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살아 있다는 것의 안도와 다행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날이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속보를 나에게 일깨운 것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살난 아들이었다. 일찍 아빠를 여의면서 아이는 가슴에 커다란 불도장이 찍혔다. 그 때문에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평소 뉴스에 민감했다.
저 안에서 아이들이 죽었대요. 어떻게 해, 엄마.
한여름 밤의 대형 화재라니. 그것도 야외 캠프장에서. 토끼장 같은 수십 개의 방에 비상 계단이 양쪽에 두 군데밖에 없었다는 것. 500명이 묵는 대형 수련장에 구조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 뼈와 살이 녹아 잿더미가 된 바로 그 아이들의 우상인 119 구조대가 늑장 출동했다는 것….
유치원생이라면 4세에서 7세까지의 유아들이다. 그들은 청소년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어영부영 끼워맞춘 전시용 프로그램에 내맡겨져 있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건강한 남녀가 부부가 되어 안팎으로 밤낮없이 열심히 뛰어도 경제 능력이 안돼 아이 하나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아이 하나마저도 안심하고 맡길 데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그토록 숨차하면서 젊음을 바쳐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애들은 어디 갔죠? 어디갔느냐구요오!
하룻밤 새에 재가 된 아이들, 아니 새끼들. 명지털도 채 벗지 않은 병아리 같은 새끼들을 만져볼 수도 없이 몸부리치고 있는 어미의 절규가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차마 눈 뜨고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아이는 언제 울었느냐 싶게 금세 명랑해져서 여느날처럼 노란 유치원 차에 올라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러했으리라.
재앙은 진정 혼자 오지 않는 것일까. 백화점, 다리, 지하철, 계곡, 야외 수련장. 도처가 지뢰밭이다. 재앙은 앞으로 어디를 덮칠 지 모른다.
20세기의 마지막 여름이다. 엊그제는 삼풍 참사 4주년 되는 날이었다. 동어반복이 계속되는 한 언어는, 역사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안전 불감증. 사고 때면 제일 먼저 터져나오는 그 단어를 언제쯤이면 듣지 않고 인간다운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새끼 잃은 어미의 슬픔 곁에서 삼가 먼저 간 스물셋 천사들의 명복을 빈다.
/소설가 함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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