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 장준하(1918~75) 묘소. 동지들이 만든 작은 묘비는 그를 『물결에 부딪히는 달빛과도 같이 언제나 자기 희생 속에 빛을 발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묘비명처럼 그는 조국이 희생을 원하면 기꺼이 자신을 바쳤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숭고한 삶도 곁에서 고난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장준하의 투쟁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4년 그는 학병으로 끌려가자 탈출을 감행, 6,000리의 대장정을 거쳐 중칭 임시정부로 향한다. 그는 탈출 직후 구출된 중국군부대에서 다른 탈출병 김준엽(전 고려대총장)씨를 만났다. 이들은 임시정부에서는 물론 미 OSS(전략첩보대·CIA의 전신) 중국부대에서 본국잠입훈련을 받을 때까지 사선을 함께 넘겼다.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본국잠입기회를 놓친 장준하는 김구(金九)주석의 비서로서 귀국, 경교장에서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나 여러 정치꾼들과 야합해야 하는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한신대에 편입, 학업을 마친다.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그는 부산에서 생애의 은인인 백낙준(白樂濬·작고)씨를 만난다. 백씨는 당시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해 국민사상연구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기관지 「사상」의 출판을 장준하에게 맡긴 것이다.
「사상」은 백씨의 득세를 우려한 정적들의 견제로 바로 폐간됐고 장준하는 이듬해 그 후신인 「사상계」를 출간한다. 「사상」이 정부기관지인데 반해 「사상계」는 재야에 있던 백씨와 장준하가 사재를 털어 만든 독립적 잡지였다. 이후 「사상계」는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양심세력를 대변했다.
「사상계」는 당대의 최고지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진이 자랑이었는데 이들은 매달 주제와 필자를 정했다. 소설가 김성한(金聲翰·전동아일보 편집인), 철학자 안병욱(安秉煜·전숭실대 교수), 해방후 중국에서 학업을 마친뒤 귀국한 사학자 김준엽씨 등 3총사와 지명관(池明觀) 양호민(梁好民) 현 한림대교수 등이 주간과 상근편집위원으로 편집위원들을 이끌었다. 또 나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金相浹·작고) 유창순(劉彰順) 현승종(玄勝鍾)씨도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계창호(桂昌鎬·전일간스포츠 편집국장)씨가 손세일(孫世一)현 국민회의 원내총무 등 서울대 문리대 동창생들을 몰고 입사하는등 젊은 인재들도 기자로 일했다. 또 함석헌(咸錫憲·작고)씨는 칼럼니스트로로 이름을 날렸다.
장준하에게 있어 40년대가 독립운동시대, 50~60년대가 「사상계」시대였다면 60년대말부터는 정치의 시대였다. 그는 대선후보 단일화를 이뤄낸 뒤 67년 「사상계」의 경영권을 넘기고 동대문을구에 출마,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에서는 동료의원인 박영록(朴永祿·전평민당 부총재)씨와 함께 신민당의 원외투쟁을 선도했다. 당시 청년운동권의 박정훈(朴正勳) 조홍규(趙洪奎) 현 국민회의 의원과 김도현(金道鉉·전문화체육부 차관)씨도 그를 도왔다. 73년에는 최초의 유신반대투쟁인 개헌청원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재야에서 김재준(金在俊)목사, 지학순(池學淳)주교, 계훈제(桂勳悌·이상 작고)씨, 백기완(白基玩)씨, 강원룡(姜元龍)목사, 김동길(金東吉)전연세대부총장, 홍남순(洪南淳)변호사 등이 동참했고 이부영(李富榮)현 한나라당 원내총무가 실무, 이신범(李信範)현 한나라당 의원과 유광언(劉光彦·전 정무제1장관실 제1차관)씨가 학생운동권과의 협조를 담당했다.
75년 그는 경기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동지들과 가족들은 이 죽음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다. 다행히 여당은 최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추진키로 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의문사를 조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기념사업회 운영분과위원장 유광언씨의 말대로 『장준하를 비롯한 이들의 의문사가 규명되는 날 역사는 한페이지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