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합동조사반 조사내용 요지 -민영미(閔泳美·35·여)씨는 북한측의 조사과정에서 극도의 불안감으로 두차례나 실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통일부, 국가정보원, 경찰청이 참여한 정부합동조사반이 26~28일 민씨를 조사한 내용 요지.
◆억류경위
민씨는 20일 오후 2시께 관광조장의 안내로 금강산 구룡폭포를 관광하던 중 북측 환경감시원에게 인근 칼바위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의 「미(彌)」자를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과정에서 민씨가 먼저 『빨리 통일이 돼 우리가 금강산에 오듯이 선생도 남한에 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귀순자 전철우와 김용이 TV프로에도 나오고 잘 살아요』라고 말하자 북측 감시원이 갑자기 민씨의 관광증을 압수했고 10분뒤 다른 여자 감시원이 나타나 사죄문과 벌금 100달러를 부과했다.
이후 민씨는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거쳐 오후 8시께 권총을 휴대한 북한 군인 4명에 의해 장전항 인근 컨테이너에 수용됐다.
◆조사상황
1.컨테이너 조사 컨테이너 안에는 책상 4개, 의자 5개, 간이침대 1개가 비치돼 있었으며, 쌀밥과 사과, 음료수 등이 제공됐으나 민씨는 음료수만 마셨다.
21일 새벽 2시께 조사관 3명이 들어와 귀순유도 발언을 시인하는 사죄문 작성을 강요했으나 민씨는 『단순히 말을 걸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내용으로 A4 용지 크기2장 분량의 사죄문을 3차례에 걸쳐 제출했다. 조사관은 『누구 지시를 받고 왔느냐』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3년이고 10년이고 맛을 봐야 한다』고 위협하며 서류뭉치로 책상을 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폭행은 없었다.
이날 오전 10시께 민씨는 화장실로 가던 중 현대직원과 승용차에 탄 아들 승훈(6)군이 손을 흔들며 엄마를 부르는 것을 보고, 북측에 아들을 만나게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하루종일 조사를 받은 민씨는 오후 10시께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며, 22일 오전 6시30분에 다시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이후 민씨는 본인과 남편의 학력, 가족사항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으며, 이 과정은 모두 비디오로 촬영됐다.
2.금강산여관 조사 22일 오후 1시께 금강산여관으로 옮겨진 민씨는 3층 객실에 수용됐다. 객실은 7~8평 크기로 침대 2개, 의자 4개, 냉장고, TV 등이 비치돼 있었다. 객실내에는 여자 4명이 교대로 민씨를 감시했으며, 복도에도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상주했다. 민씨는 「민영미씨」 「영미씨」 「동무」 「아줌마」 등으로 불리웠다.
평양에서 왔다는 조사관 2명은 처음부처 다시 조사하면서 공산당에 대해 웅변을 해볼 수 있겠는지, 앞으로 10년은 썩어야 하는데 죄를 인정하겠는지 등을 물었다.
◆사죄문 작성
23일 조사관 2명은 『진실을 얘기하라』『핏불을 나눈 조선사람인데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등 하루종일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고, 24일 오전 9시30분께부터 정오까지도 거듭 사죄문작성을 요구했다.
이날 오후 5시께 북측 조사관은 미리 준비해 온 사죄문(A4용지 2.5매 분량)을 주면서 『사죄문 초안이니 읽어보고 베껴 쓰라』고 강요, 민씨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그대로 작성해 제출했다. 이어 25일 오전 7시께 북측 조사관은 『사죄문이 잘 됐다』며 사죄문 말미에 작성일과 이름을 쓰게 한 다음 무인, 서명하도록 했다.
◆석방경위
25일 오후 5시30분께 조사관 2명이 촬영기사 1명과 객실로 들어와 6시까지 사죄문낭독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민씨는 오후 6시5분 북한감시원 3명의 호송을 받아 온정리 소재 현대보건소로 이동, 현대측에 넘겨졌으며 오후 8시 현대측 선박에 승선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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