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는 언제나 나오나』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더 이상 밀리지 않을 방안을 미국 국회에 제출해야 하는 페리 조정관이 지난 반년 내내 들어온 질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경제봉쇄를 풀고 관계정상화에 나선다는 일괄타결안에 대해 두어달 전 몇마디 말을 던진 이후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 페리를 비판하는 이는 많지 않다. 여든 야든 대다수는 페리가 침묵할 때에는 침묵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페리가 지금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그 기본방향은 강성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지난번 방북때 북한은 페리에게 일괄타결안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전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대북한 정책은 벼랑끝 전술에 이미 인내심을 잃은 미국 국회로 넘어가게 되고 클린턴 행정부는 대결로 가는 수순을 밟을 위험성이 크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내심을 한번 더 발휘하여 북한의 「말」보다 「행동」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미사일이 발사되는 날에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을 제재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페리는 사실상 침묵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포동미사일 발사를 마지노선으로 일단 설정해 두고 있기 때문에 당근만 주면 북한과 일괄타결할 수 있다고 꿈꾸는 온건파로 오해받지 않는다. 반면 북한의 부정적 반응이 공갈일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김정일을 코너로 몰아 넣는 강경파로 비판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북한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공존과 평화로 가는 작은 「창」이 존재할 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는 신중한 인사로 미국 국회내에서 초당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페리는 바로 그러한 초당적 이미지를 다지면서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가고 있다.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핵개발에 나서는 것은 절대로 간과해서 안된다는 대원칙에 다수가 동감하는 상황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대조적이다. 대북한 정책을 책임져 온 임동원 통일장관은 수석때부터 다양한 수사로 냉전구조 해체를 역설해 온 「햇볕정책」의 대변인이다. 그는 역대 정권의 대북한 정책이 남북대결을 악화시키기만 한 냉전적 정책이었을 뿐이라고 몰아세웠는가 하면 남이 양보하면 북 역시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줄거라는 기대 아래 사회 일각의 신중론을 보수논리로 무시해 버리면서 상호주의까지 사실상 포기했다.
게다가 페리가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를 억지한다는 제한적 목표를 설정할 때 임동원장관은 북한체제의 본성까지 변화시킨다는 몇 배 더 어려운 포괄적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다 반론이 제기되면 한 보 후퇴하여 타정파의 불만을 풀어주고 언론의 걱정을 달래려하기보다 「결국은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사회가 알게 되리라」는 확신하에 더 많은 당근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러한 수많은 말과 행동은 페리의 침묵과 달리 이질적 정파 사이에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갈등과 반목만을 낳았다. 그 결과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서해교전이 터지고 관광객 억류사태가 벌어지면서 여론은 들끓고 정부는 궁지로 몰렸다.
대북한 정책이 권력누수를 가속화한 것이었다. 지금은 희망을 품고 북한과의 신중한 대화에 나설 때이다. 최소한의 정치적 공감대마저 형성하지 못한 채 계속 밀어붙이기식 햇볕정책을 고수한다면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끌어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사회 내부의 분열만을 초래한다.
그렇게 되면 예측불허의 북한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정부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정치적 모험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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