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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칼럼]49주년과 50주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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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칼럼]49주년과 50주기 사이

입력
1999.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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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다가온 본능적인 느낌은 『이러다가 전쟁이?』였다. 「서해 교전」소식을 처음 듣던 때의 일이다.마음 한 구석에는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제법 이성적인 생각이 자리 잡았으나, 전쟁의 발발과 확대가 언제는 그런 이성의 소관이었더냐는 반문에 부딪쳤다. 바로 악몽인 것이다. 그 중에도 6·25를 겪은 세대의 전쟁악몽은 체질과도 같은 것이다.

그 6·25가 49주년이다. 반세기가 다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의 날이다. 그 악몽을 다시 일깨운 「서해 교전」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는 지금 몹시 어지럽다.

서해에서 상당한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고 알려진 북은 베이징에서 남과 미국을 상대로 2개의 테이블을 차린 상태이고, 금강산 관광객 한 사람은 북에 의한 억류상황이 계속되는 중이다.

이런 교전과 대화와 억류가 서로 어떻게 연계되는지, 49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6·25」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입만 열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 통일은 어디서 손을 흔들고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원칙은 언제나 「전쟁은 안된다」는 것 뿐이다.

한때 「어떤 통일도 좋다」는 통일지상론이 있었다. 터놓고 말도 못하던 독재 폭압시대의 일이다. 금제(禁制)에 대한 과격한 반응으로서의 민족통일절대론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절대론이나 지상론보다는 객관적이고 성숙한 통일논의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분단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의 분단은 강대국의 이해에 의해 타율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민족사 안에 늘 반복되어온 민족분열의 무서운 병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성 내부에도 원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 제각기 나라를 세우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 분단과 분열에 안주하여, 그 분단과 분열이 초래한 비극을 타파하려는 화해의 노력에 게을렀음을 부끄러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신학자는 특히 분단과 6·25의 비극이 우리 민족에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주었으나, 바로 그 때문에 민족의 일치와 화해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민족이 하나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가슴 깊이 되새기게 해주고 있으므로 「6·25의 비극과 분열의 현실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는 역설을 펴고 있다.

그야말로 「역설」이지만, 화해의 의미를 강조하는 이 「생각하기 나름 이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 흩어져 살면서 오히려 하느님과 조국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애국심을 키웠던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곧 우리 것일 수도 있다는 논리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가 오늘 「조국의 외연(外延)」을 전세계로 넓힌 결과가 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떻든, 「화해」를 화두로 떠오르게 하는 6·25 49주년은 바로 하루 뒤인 26일로 백범 김구선생의 50주기를 기념한다는 점에서, 결코 범상할 수 없는 시대의 징표가 되고 있다. 백범이야말로 분단의 역사에서 그 분단에 죽음으로 맞섰던 「화해의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하고 외로운 북행 길에 나섰던 일은, 그후 암살범의 흉탄에 쓰러지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 비로소 작게나마 바른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 절대적이고 빛나는 정신은 「화해」다.

현실에서의 통일은 어느 한쪽의 붕괴를 뜻하므로 「내가 이기고 너는 죽어야 하는」 죽임의 게임이라는 딜레마가 있다. 통일이라는 말도 그동안 위정자들에 의해 무수히 악용되어 온 나머지 나쁜 때가 묻었다는 견해가 옳다.

통일이라는 말 대신에 「화해」라는 말을, 「공존」 「공영」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햇볕」이며 「포용」이라는 말이 한쪽을 턱없이 불편하게 하고 있음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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