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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조봉암 北첩자몰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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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조봉암 北첩자몰아 처형

입력
1999.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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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 -◆전사(前史)

해방 3년사는 한반도 분단사이기도 하다. 미소(美蘇) 양대국의 분할점령으로 시작된 「조선의 독립」은 민족적 역량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기에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대국가 경영의 경험이나 강대국 외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민족은 미소 양대국에 의지하여 우리 뜻대로 우리가 바라는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으리라 믿고 북은 소련에, 그리고 남은 미국에 의존하기만 했다. 미소를 따라 사상적으로 양극화된 한민족은 이렇게 해서 분단을 자초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미국과 소련의 편을 드는 세력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미소 이익의 조화 속에 양대국의 국가적 이상을 조화시키는 노선에 따라 통일 독립된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를 추구한 민족자주적 세력 또한 강력했다.

좌우합작기간 중의 주도세력인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의 극좌우를 배제한 중도적 좌우연합세력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통일민주국가 건설노력은 47년 4월의 트루만 독트린 선포로 동서냉전이 공식화하면서 좌절되었다.

UN결의에 의한 남한만의 단정 수립에 반대하여 민족 자주적으로 남북협상에 의해 통일민주정부를 추구하려던 김구(金九) 김규식의 노력도 단정 수립으로 좌절된다. 남에는 친미 일변도의 정권이, 그리고 북에는 친소 일변도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민족자주세력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지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된다.

폭력적 대결 속에 극좌우 정권을 수립한 남북정권의 대립은 마침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극으로 극에 이른다. 이 기간 중 이른바 중간파의 입지는 아주 자취를 감춘다. 먹느냐 먹히느냐 이외의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국내 정치상황

52년 부산정치파동에 이어 54년 4사5입 개헌파동이 일어 독재화된 허울좋은 민주대한에 민주 반독재의 호헌파와 독재추구파가 격돌한다. 범야 민주세력 구축에 나선 호헌파 보수세력은 조봉암(曺奉岩)에 이끌려온 민주적이며 민족적인 혁신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일제하 독립투쟁기 혁명적인 사회주의 세력인 공산당 계열의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해방 후 공산주의를 지양, 민주적 사회주의로 자기발전을 이룬 조봉암에 의해 이끌린 세력은 좌우합작기간 중 중도우파 김규식과 호흡을 같이 했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세력들로 이승만(李承晩) 버금가는 득표력을 과시했던 세력으로 범야 대동의 세력 구축을 지향할 경우 그들을 제쳐두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굳어져 있었다.

호헌파 중 극우파인 자유파와 중도파인 대동파가 조봉암과의 연대문제를 둘러싸고 한동안 다툰 끝에 자유파가 승리함으로써 조봉암과의 연대는 좌절된다. 민주대동운동에서 밀려난 조봉암파는 이른바 광릉회합을 통해 한국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탄생시킨다.

신익희(申翼熙)는 민주당 후보로, 조봉암은 진보당 후보로 그리고 이승만은 자유당 후보로 3대 대통령 선거는 3파전이 된다.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 대 조봉암의 1대 1승부의 양상을 띠게 된 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20만표, 총 투표수의 약 25%를 얻어 일약 위협적인 존재로 우뚝 선다. 사실 이 선거결과는 자유당의 부정선거 탓이었을뿐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진」 선거였다.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58년의 민의원 선거에 대비하고자 진보당 결성을 서둘러 마친 뒤, 도·시·군 당조직에 나선다. 테러를 불사할 초강력 탄압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차기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 뻔한 그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경찰과 특무부대가 앞장선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밟아도 밟아도 그들 진보당 세력은 또 일어섰다. 마침내 자유·민주·무소속의 범 보수세력이 진보당 말살에 합의한다.

◆국제정세

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반스탈린운동과 평화공존노선을 선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계혁명노선을 포기함으로써 소련의 극좌적 노선이 온건노선으로 수정될 것이 예상됐다.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일로서, 흐루시초프는 독자노선의 선포와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공언한 헝가리에 무력 개입,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인 일레 나지를 반역의 이름으로 처형하고, UN총회에 참석한 흐루시초프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연단을 내리치면서 『당신들 자본주의자들을 20세기 안에 매장하고 말겠다』고 협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반스탈린운동에 낙관적인 기대를 걸었던 서방세계는 아연 긴장한다. 군비경쟁은 한 차원 높은 핵미사일의 경쟁시대로 돌입하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긴장이 조성된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가 득세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토록 국내외 정세가 극악한 환경 속에서 진보당은 보수세력과 미국의 표적사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건경과

민족적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는 진보당은 눈엣가시이고 비우호세력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세칭 진보당사건은 무르익는다. 일차적 공격은 조봉암을 갖가지 간첩사건에 연계지우는 일이고, 이차 공격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노선을 북의 평화공세에 연계지우는 일이다.

이도 저도 안되니 이제는 대한민국의 국군방첩부대(HID) 대북첩자를 북의 첩자로 만들어 조봉암과 연계지우는 것이다. 이 공작이 마침내 성공한다. 조봉암은 첩자로 처형되고 진보당은 첩자의 목적 수행의 수단으로 이용한 정치조직이니 불법이라 하여 불법화된다.

◆진보당사건의 의미

자본주의의 본산인 유럽은 오늘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합리적 자유주의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라는 두 세력을 기간 세력으로 한 좌우 다당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또한 극좌우 세력이 미미한 속에 온건한 좌우세력이 오랜 세월 동안의 이념적 정책적 수렴과정을 통해 오늘날 상당히 근접한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면에 있어 우리의 정당체제는 엄청난 낙후성을 보인다. 가까운 진리를 멀리 하고 가물거리는 진리를 좇은 개념조차 정리되지 않은 진보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 방황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유산이다.

인류 보편의 이상, 자유·평등·정의를 이데올로기적 기초로 하는 진보당은 죽어있는 것같지만 살아 숨쉬고 있다. 한국적 진보에 대한 개념 정리와 이데올로기적 정향은 진보정당을 지향하는 진보세력들이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보편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진보당은 탈냉전시대를 맞아 역사 속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선상에 오늘을 숨쉬고 있다.

◆정태영· 鄭太榮

▲31년 전북 익산 출생

▲56년 서울대 문리대 졸업

▲57년 동양통신 외신부기자

▲58년 진보당 서울시 상무위원

▲95년 건국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저서

「조봉암과 진보당」(91년, 한길사)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95년, 세명서관)

다음은 29일자에 '4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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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탄생 100주년이자 사망 40주년이 되는 해.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주비위원회」주최로 3월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렸고 사회각계 및 정부차원에서도 그에 대한 「정치살인」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 일고 있다.

조봉암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일제하 공산주의 독립운동 시기. 경기 강화에서 출생, 강화농업보습학교와 서울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한 그는 3·1운동에 가담해 1년간 복역한다.

출옥 후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사회주의자로 항일운동을 벌인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 핵심적 간부로 활약하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7년간 투옥된다.

45년 인천에서의 지하운동으로 다시 구금됐다 해방이 돼 풀려난 죽산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인천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가 해방후 이데올로기 전환을 겪었던 제2기였다. 그는 46년 박헌영(朴憲永)을 비판하는 서한을 발표, 공산당을 탈당하고 48년 4월 제헌의원으로 선출된다. 그의 「전향」 아닌 공산주의 「지양」은 이념보다는 민족현실을, 계급투쟁보다는 계급타협을 주장한 민족적 민주사회주의자의 행동으로 평가된다.

죽산은 초대 농림부장관을 거쳐 2대 의원에 재선돼 국회부의장을 지낸다. 이때부터가 정당활동기다. 52년, 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그는 56년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창당 개회사에서 죽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날로 수정되어 양 진영이 몹시 미워하던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지 않는 나라가 없다』며 현실적 민족통일의 길을 천명했다.

죽산의 맏딸 호정(72)씨등 유족과 창녕 조씨 문중은 물론, 김대중(金大中) 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죽산의 사면복권을 요청해왔지만 아직도 그의 묘소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비문도 없이 남아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연구자료

▲전성환 「진보당 연구」(87,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유근일 「50년대 후반의 국가와 헤게모니 투쟁」(87, 〃) ▲오유석 「진보당 사건 분석을 통한 1950년대 사회운동 연구」(90, 「경제와 사회」여름호) ▲김창진 「1950년대 한국사회와 진보당」(91, 「1950년대 한국사회와 4·19혁명」, 태암) ▲정창현 「진보당 운동의 전개와 성격」(91, 「한국현대사 2」, 풀빛) ▲서중석 「조봉암 진보당의 진보성과 정치적 기반」(92, 「역사비평」가을호) ▲박태균 「조봉암 연구」(95, 창작과비평사) ▲서중석 「조봉암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99, 「역사비평」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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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개요와 쟁점

 - 1심 5년형… 2심 돌연 사형선고 -

58년 1월 11일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 이튿날 윤길중(尹吉重) 간사장 등 간부들이 잇달아 경찰에 구속된다. 혐의는 진보당의 강령인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며, 조봉암이 이중간첩 양명산(梁明山)과 접선해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7월 2일 열린 1심에서 조봉암과 양명산에게는 징역 5년, 평화통일론·간첩 혐의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10월 25일 2심과 59년 2월 7일 대법원 판결에서 조봉암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재심신청 다음날인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양명산은 2심에서 특무대의 위협과 회유로 허위진술을 했다고 북한의 지령사실을 부인했지만 2심과 최종심은 진술 번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진보당 사건의 핵심은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과 자유당이 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총 투표수 900만표 가운데 216만표를 얻는 등 커다란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며 가장 큰 정적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폭압정치의 과정이었다는 것.

학계 평가는 50년대 한국 정치구조의 폭력성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는 것, 『조봉암의 죽음을 불러온 평화통일 노선은 당시 미·소 평화공존 분위기를 반영한 선각자적 노선』(김학준 인천대총장)이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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