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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육교형'지도자들

입력
1999.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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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을 건너는 지하도와 육교가 나란히 있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선택에 따라 「육교형 인간」과 「지하도형 인간」으로 나뉜다고 한다. 계단을 먼저 힘들게 올라갔다가 편하게 내려오는 육교형과, 반대로 쉽게 내려갔다가 힘들게 오르는 지하도형으로 갈라진다. 관상가 김승길씨의 분류법이다.관상에 비합리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상가에게는 나름대로 사람을 관찰하는 경험칙이 있고 실제인물에 적용하는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이 분류법은 문학적 비유와 상징이다. 김승길씨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희곡작가이기도 하다.

지하도형으로는 영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을 꼽을 수 있고, 지난주 퇴임한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대표적 육교형에 해당할 것이다. IMF 체제 속에 집권을 시작한 김대중 대통령은 힘들게 경제난을 헤치며 이제 막 육교 상판에 올라선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고난은 육교에 올라섰을 때 무더기로 몰려오고 있다. 가파른 길 보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 방심과 해이는 찾아온다.

고관집 도둑사건과 옷로비 사건,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이 최근 잇달고 있다. 국내외를 긴장시켰던 남북한 해군 교전은 예측하기 어려운 북한과 빚어진 사건이라고 치더라도, 파업유도 의혹은 앞으로 노사문화 혹은 노사정 관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것으로 보인다.

특검제를 도입해서 진상을 밝혀내도 어두운 기억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파업유도 발언은 국민의 명예와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16, 17일 각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동부와 노사정위가 변변한 대책조차 마련하지 못한 가운데 총파업이 큰 파장으로 번지지 않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신뢰성을 냉소하는 분위기는 봄철 황사현상 처럼 사회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파업유도 의혹을 보면 검찰이 아직도 냉전적 시각에 고착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검찰은 노조를 방해·파괴하는 것이 본분에 충실하고 애국하는 길이라고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노조는 사상적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초 공산국가 폴란드에 자유노조가 탄생함으로써 그 징검다리를 딛고 폴란드가 자유화의 길로 줄달음쳤고, 급기야 자유노조는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화약고가 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노동계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분노한 국민과 노동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먼저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관련자를 문책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도 이 의혹사건을 분노 확대의 계기로만 이용해서도 안된다. 대안 제시가 미약한 채 시위가 장기화할 때 국민의 지지는 식게 된다.

여성 노조운동 연구자로 명성이 높은 미국 하버드대의 엘랜 버나드 교수는 『정치가와 정부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노동자는 항구적 존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살아 있어야 민주주의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사정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주도하기 보다는 노사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IMF 체제의 고통이 한 차례 지나간 이제, 노사가 중심역할을 하고 정부는 조정역을 하는 새로운 노사정위를 탄생시켜야 한다. 또 정부는 명료하게 파업유도 의혹을 수사하여 책임자를 문책하고 제도를 개선해서 추락한 신뢰를 복원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대부분 지하도형이었던 전직 대통령들과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은 육교형 지도자의 이미지를 완성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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