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중소기업에 1억원의 돈이 생겼다. 기업가는 고민에 빠졌다. 요로에 로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나온 좋은 기자재를 살 것인가」힘있는 곳에 돈을 뿌린다면 당장의 성과는 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업경쟁력은 결코 좋아질 수 없다. 비록 오늘 내일의 매출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첨단설비를 구입한다면 경쟁업체들을 앞서고 더많은 구매선을 확보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다. 한국경제가 바로 지금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1년반동안 한국경제엔 「선택」이란 없었다.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고, 외국인들로부터 달러를 유치하려면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IMF식 교과서」대로 외길만 열심히 달리면 충분했고 성실하게 뜀박질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국가부도도 면했고, IMF정책간섭도 줄어든 만큼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 이는 올바른 선택과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도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란 얘기다.
올바른 선택을 가능케하는 「솔로몬의 지혜」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만 가능하다. 중소기업이 1억원을 로비에 쓰지 않고 첨단설비구입이나 연구개발(R&D)에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상호채무보증금지 부채비율감축 결합재무제표작성등 아무리 「글로벌 스탠다드」를 도입한다해도 기업인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경쟁력은 영원히 뒤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소득만 늘어난다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이 단지 「중간소득계층」은 아니며 걸맞는 도덕성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예컨대 정치적으로는 유권자로서 올바른 권리를 행사하고 경제적으로 소득에 걸맞는 소비생활을 해나가며 사회적으로는 각종 봉사활동이나 단체기부에 관심을 갖고 도덕적으로 공동체 윤리에 어긋나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아무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아니 2만달러를 넘는다고해도, 이웃도 사회도 모르는 「경제동물」이 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해질수 없다.
IMF 1년반을 보낸 지금 「패러다임」의 잣대만으로 본다면 우리는 아직도 「IMF재학생」, 그것도 한참 「저학년생」이다. 제도는 개혁됐지만 아직도 「낡은 패러다임」이 정치 경제 사회등 전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기업, 특히 재벌들은 스스로의 노력없이 경기부양이 가져온 실적호전에 도취해 오히려 과거확장시대의 향수에 젖어들고 있다. 금융기관도 심사능력개발은 뒷전으로 미룬채 당장의 이익에만 혈안이 돼 기업을 「키울 생각」을 않고 오직 이미 「키워진 기업」만을 상대하고 있다.
근로자들 역시 본격적인 내몫찾기가 시작됐고, 부유층의 소비행태는 일반서민들에게도 급격히 확산돼가고 있다. 허리띠를 풀고 있는 것이다. 공공부문에선 「조폐공사사건」이 마치 구조조정연기의 명분처럼 왜곡되어가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인기몰이」식 정책에 여념이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결코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생산과 투자에만 전념하는 기업, 남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시민, 지연 학연이 약해도 능력과 소신있는 공무원이 「보상」받는 사회를 위한 각오와 다짐이 있어야 한다. 과거식의 행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가 만들어져야만 새로운 의식과 행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가시적 구조조정건수과 경기호전지표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IMF 졸업장은 영원히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환란은 재연될 수 있다"
「환란(換亂)은 재연된다」 6·25 이래 최대 국난,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경험한 우리로선 끔직한 경고다. 하지만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멕시코는 76년이후 94년까지 4차례의 금융·외환위기를 경험했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는 3차례, 아르헨티나는 2차례 위기를 맞았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80년대 제로성장과 폭등한 물가로 혹독한 시련을 겪고서도 말이다.
환란은 왜 되풀이 됐을까. 76년 첫 위기를 경험한 멕시코. 이전까지 연평균 6%이상 성장하며 68년에는 하계올림픽을 유치할 만큼 기적의 국가로 꼽혔다.
1차 석유파동(73년)이후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부족재원을 외채 등으로 보전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고갈돼 IMF 자금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다행히 대규모 신규 유전이 발견되면서 위기는 짧게 끝났다. 오히려 주요 산유국으로 부상하면서 넘쳐나는 외자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는 방만한 재정운영과 투자로 이어졌고, 수입확대와 외채누적 속에 2차 석유파동으로 재정수입마저 감소하자 82년 대외채무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87년과 94년 위기가 재연되는 동안 개혁이 추진됐으나 미완에 그쳐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손을 들고 말았다.
중남미 위기는 상당부분 재정적자에서 비롯됐다. 정치불안과 고성장 이면의 소득불균형, 이에 따른 사회불만을 재정지출 확대(외채 누적)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경우 4차례 위기가 거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에 발생했다. 위기후 새로 집권한 정권들은 정부 빚을 줄이려고 재정개혁을 추진했으나 공무원 공기업 노조 등의 집단반발에 부딪혀 중도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 IMF와 선진국의 도움으로 위기를 수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미봉에 그치면서 경제구조는 바뀌지 않아 석유파동이나 투기자본의 공격 등에 쉽게 무너졌다.
지난해 브라질의 환란도 「재정적자 누적→ 인플레와 국가채무 급증」이 주요 원인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환란은 중남미와 성격이 다르다. 외채위기보다는 외자의 급격한 유출에 따른 유동성위기로 분류된다. 그러나 영국이나 스웨덴 등 선진국에서도 외환위기가 발생했듯 사실상 미국을 제외하고는 환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시적인 위기수습에 안주해 개혁을 미루거나, 해외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에 흔들리는 경제 체질을 유지하는 한 또 한차례의 환란은 피할 수 없다.
/정희경기자 hkjung@hk.co.kr
* '고성장 완전고용' 환상을 버리자
「고성장 완전고용은 꿈도 꾸지 말자」「두자릿수 수익률 환상을 버리자」
IMF체제를 맞기전 한국경제는 실질성장률이 7%만 밑돌아도 「저성장」, 실업률이 2%만 넘어도 「고실업」이라고 주저없이 얘기했다. 경제가 워낙 빨리 커졌고, 그만큼 일할 사람도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질적 인플레가 있었다. 높은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은 과도한 임금인상으로 이어졌고 높은 인플레와 거품경제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IMF위기였다.
이젠 고성장, 완전고용은 오지 않을 것이다. IMF체제로 성장잠재력이 위축된 탓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인플레를 동반하는 고성장과 완전고용은 더이상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이성태(李成太)조사국장은 『상당기간 실업률이 5%이하로 내려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실업률 자체가 아니라 실업률을 그 사회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말했다. 실업자가 좀 많더라도 사회안전망이 확보됐다면, 또 실직후라도 재취업이 용이한 고용시장의 탄력성만 갖춰져있다면 일정 실업률은 오히려 임금을 안정시켜 인플레없는 경제체제정착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이제 중장기적으로 5%대 성장, 4%정도의 실업률, 3%이내의 물가상승률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경제주체들이 새로운 성장환경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우선 「기대수익률」부터 낮춰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자율이 연 12%, 즉 1억원을 예금하면 월 100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금리가 연 7~8%대로 떨어진 요즘 「한건」을 노리며 주식과 부동산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리는 성장률과 물가를 더한 수준이다. 5% 성장, 3% 물가가 예상되는 올해 7~8% 금리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자율이 턱없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인플레 기대심리」이다. 경제환경이 달라졌는데도 경제주체의 사고는 아직도 고성장·고물가·고임금시대에 있는 것이다. 인플레 기대심리는 실제 인플레로 이어지고 결과는 거품으로의 회귀일 뿐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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