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잘 하는 가수가 꼭 인기가수가 되는 것은 아니듯 인기있다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작은 욕조 속에 몸을 뉘였을 때/작은 달팽이 한마리가 내게로 다가와/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줬어」(「달팽이」) 도시에 버려진 작은 소년처럼 낮게 노래했던 「패닉」의 이적(25)도 굳이 나눈다면 노래를 잘 하는 가수는 아니었다.「패닉」으로 음반 3장을 내고, 프로젝트 음반 「카니발」을 낸 이후 잠잠했던 이적이 솔로 음반을 냈다. 막바지 음반작업을 하고 있는 서울 논현동 베이 스튜디오. 9일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에도 소녀팬들이 남아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뷔 4년, 그가 괜찮은 싱어송 라이터라는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달팽이」 이후 뚜렷한 히트곡도 없는 그의 인기는 꽤 오래간다.
『사실 제가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가사나 음악에서 느껴지는 나름대로의 감수성, 그런 것들을 대중들이 좋아해 주는 것이겠지요』
「막다른 길(Dead End)」. 그의 첫 솔로 음반 제목은 비장하다. 이제 막바지에 몰려 음반을 내도 1만장을 넘기지 못하는 비(非)댄스그룹 가수들의 운명을 염두에 둔 것처럼 들린다. 『「끝」에 대한 노래가사가 많아서』라고 가수는 설명한다.
솔로로 나선 그의 모습은 조금은 변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수로서의 자신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전엔 내가 노래를 잘해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젠 노래를 좀 잘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연습도 비교적 많이 했어요』
모던 록, 발라드, 테크노 등 다양한 수록곡 11곡이 갖고 있는 정서는 「패닉」1집때와 흡사하다. 초발심(初發心)을 다시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패닉 3집, 카니발 때는 조로(早老)의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무게를 좀 덜어내고 좀 무거운 주제라도 가벼운 터치로 다루고 싶어요』 『무겁지 않으면서도 완성을 충실히 보여주는 비틀스와 같은 음악이 좋다』는 그의 지향이 이번 음반에는 충실히 반영됐다.
발라드 「장마」는 「너 때문에 울게 될 줄은 몰랐어」라고 나직히, 그리고 부드럽게 노래하는 데 이전에 비해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역시 이적의 장기는 사회적 맥락을 경쾌한 실험정신에 녹여 낸 것. 「하루에도 우린 몇번씩 꼭 철전지 원수를 만들지/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적의 등에 저주를/사실 생각하면 작은 일인데 그저 나의 발을 밟은 것인데…조금씩 난 미쳐가고 있다/적같은 건 내게 필요없다」(「적」) 다소 격해진 보컬이 정통 록반주에 실렸다.
「죽은 새들 날다」에서는 보코더를 사용한 도입부의 음성변조, 프로그래밍(컴퓨터를 이용한 연주기법)을 통한 기계적 연주가 특이한 맛이다. 『연대 측정 불가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적의 말처럼 복고적 취향과 음악적 실험이 잘 어울렸다. 예감이 좋다.
/박은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