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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소비자를 길들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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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소비자를 길들이는 사회

입력
1999.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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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 45주년 특집] 불편한 사회/어느 30대주부의 힘겨운 24시 -우리 사회는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힘겹다. 합리성보다는 빽과 요령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관행에 피해를 당해도 먹고 살기 바쁘거나 귀찮아서 참고,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에 분통이 터져도 마땅히 하소연할 곳이 없다. 시민·소비자단체에 접수된 민원을 주요 분야별로 살펴본다.

/최윤필기자 walden@ 안준현기자 dejave@hk.co.kr

오늘따라 자명종 소리가 유난히 짜증스럽다. 간 밤에 잠을 설친 탓일까. 주부 강모(36)씨에게는 요즘들어 되는 일이 없다.

새벽6시. 강씨는 침대에 누운 채 간밤의 전화통화를 떠올렸다. 시동생의 신용카드 연체대금 290만원을 이번 주내에 안갚으면 신용불량거래자로 등록하고 차압을 하겠단다.

남편은 시동생을 형사고발하겠다는 말에 지난 달 월급에서 이미 50만원을 갚은 터. 카드사는 연체대금을 대출형식으로 전환, 남편을 일방적으로 연대보증인으로 설정한 뒤부터는 숫제 협박이다.

남편 출근과 두 아이 등교를 거들고 설거지를 끝낸 시간이 오전 9시. 오늘은 옆 동 친구네 이사를 돕기로 한 날이다. 강씨는 발길을 옮기면서 전세보증금을 못받아 지난 봄에 이사를 못한 것이 떠올라 다시 화가 치민다. 계약기간이 만료됐고 그 사이 전세금 시세가 1,000만원이나 내렸는데 주인남자는 막무가내.

「집이 빠져야 보증금을 준다」면서 복덕방에 내놓은 가격은 원래 전세금 그대로였다. 법대로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없는 게 죄』라는 남편의 체념에 울며 겨자먹기로 눌러 앉았다. 유들거리는 집주인의 얼굴을 지우려는 듯 강씨는 도리질치며 발길을 재촉했다.

오전11시에 오기로 한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마음은 급한데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가재도구 다칠새라 강씨가 이사하는 친구보다 더 안달이다.

인부들의 물, 커피 심부름과 「결혼했냐, 처녀같다」는 등 희롱수준의 농담까지 어색한 웃음으로 받아주고 3만원의 웃돈을 줘서야 간신히 일이 끝났다. 이사비용 아끼느라 포장이사를 마다한 친구가 마음 불편해 할까봐 싫은 내색도 못한 강씨지만 『내가 이사하면 이런 곳에는 절대 안맡긴다』고 작심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큰 아이(12)가 또 일을 저질렀다. 하교길에 학교앞에서 20만원짜리 「한국단편소설선」을 할부로 덜컥 사들고 온 것. 별첨부록이라는 요리책과 해외관광지 소개책자 따위도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번에 남편이 할부로 사온 화장품세트도 담당외판원이 수당을 받고 퇴사했다는 이유로 해약을 거부당한 터. 「전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혹시 내일 직원들이 안나오면 어쩌지」 강씨는 내일 택시에 무거운 책을 싣고 학교까지 가서 직원들과 입씨름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저녁8시. 남편과 늦은 저녁 식탁에 마주앉아 오늘 겪은 일을 푸념처럼 늘어놓아 보지만 『원래 그런거지 뭐』 한마디 뿐이다. 남 욕할 줄 모르고 바보처럼 우직하게만 살아온 남편. 그런 남편이 좋아 10년넘게 함께 살아온 강씨지만 오늘만큼은 남편이 밉다. 화도 난다. 「세상살이가 왜 이리 힘겨운지, 착하게 살려면 끊임없이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남편 박봉에 기대 「윗돌 빼서 아랫 돌 괴는」 빠듯한 살림이지만 요령없이 원칙대로 살더라도 손해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라면 좋겠다는 게 강씨의 바람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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