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IMF로부터 긴급자금은 받아냈지만 외국인투자자의 이탈로 인해 지급불능상태로 갈 가능성은 여전히 반반이다』(97.12.12 파이낸셜 타임스) 『알려졌던 것보다 한국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더욱 타격을 받을 것』(97.12.23 워싱턴포스트)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노동 기업 관료등 보수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98.2.28 파이낸셜 타임스)IMF체제에 들어간 직후 한국을 보는 해외의 시각은 「잿빛」 그 자체였다. IMF의 신속한 자금지원과 서방선진국(G7) 중심의 「제2방어선」구축등 국제적인 「한국살리기」방안이 모색되고, 개혁성향의 새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 국제금융계는 총체적 부실과 배타적 관행에 젖어있는 한국이 위기에서 쉽게, 어쩌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반. 해외여론은 자신들의 예단이 180도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나아가 「한국=위기극복모델」로까지 평하고 있다. 『일본이 10년에 걸쳐 추진한 은행권 정비를 김대통령은 2년도 못돼 처리했다』(99.4.9 아시아위크) 『한국의 빠른 회복은 또다른 아시아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99.5.14 월스트리트저널).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FRB)의장도 『한국은 가장 뚜렷한 진전을 보인 나라』라고 평가했다. 특히 김대통령에 대한 평판은 「개혁적 인물」에서 「개혁의 전사」로 승격돼 로렌스 서머스 미재무장관 내정자는 『김대통령은 개혁을 마지못해 추진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은행의 부실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고 경기부양책과 재고소진에 의한 회복도 한계가 있다』(99.5.21 파이낸셜타임스)며 64조원 이외의 추가공적자금투입을 주장하고 있다. 중복과잉설비처리와 회계투명성확보등 기업구조조정, 특히 5대 재벌개혁에 대해선 비판의 톤이 전혀 줄어들지 않아 『재벌개혁은 여전히 그림의 떡』(포브스지 지국장)이란 시각이 팽배해있다.
위기극복의 후원자로서, 또 가혹한 개혁의 감시자로서 1년반을 지켜본 미셸 캉드쉬 IMF총재의 지적은 한국을 보는 세계의 시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대통령과 한국국민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성공을 향해 가고 있을 뿐(Emerging Success) 아직도 많을 일을 해야만 한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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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1년6개월
97년12월 「한국호」는 난파선이었다. IMF의 긴급급유로 침몰은 모면했지만 「한국호」는 안으로는 전면적 선체수술을, 밖으로는 무수한 대형암초들과 싸우며 1년반을 성공적으로 항해해왔다. 한국경제생존의 분수령이 됐던 주요사건들을 중심으로 숨가빴던 IMF체제 1년반을 돌이켜본다.
크리스마스 선물 12월3일 한국과 IMF간 구제금융협상이 속전속결로 타결돼 서명 이틀만에 첫 IMF자금 12억달러가 들어왔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진짜 위기는 이때부터였다. 달러이탈은 가속도가 붙었고 18일 외환보유액은 겨우 39억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무디스, S&P, 피치IBCA는 앞다퉈 국가등급을 「정크본드」로 깎아내렸다. 23일 환율은 2,000원(현찰매도율)을 돌파했다. 「국가부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워싱턴에 비상벨이 울렸다. 미국으로선 한국의 「경제안보」도 책임져야할 상황. 성탄전야인 12월24일 밤 10시 IMF와 서방선진국(G7)의 100억달러 조기투입계획이 전격발표됐다. IMF를 제1선, G7을 제2선으로 한 두터운 「대한(對韓) 이중방어선」이 구축됐고 환란의 불길은 비로소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연쇄 외채협상 급한 불은 껐지만 총외채의 44%에 달하는 악성단기부채는 여전히 「뇌관」이었다. 해외채권은행들이 단기부채 만기연장을 거부한다면 IMF도, G7도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98년1월 국내금융기관 단기부채를 정부지급보증하에 장기채무로 일괄전환하는 협상이 시작됐다. 미국 독일등의 전폭적 지원하에 1월28일 한국정부는 외국채권은행과 총 217억달러의 단기채무를 1~3년짜리 장기부채로 돌리는데 합의했다. 한편으론 IMF와 G7의 두겹방어선으로 바닥난 외환을 채우면서, 다른 한편으론 민간부채압박까지 봉쇄한 것이다. 4월에는 40억달러의 대규모 외평채 발행까지 성사시켰다. 환란은 진정돼 가고 있었다.
불사(不死)는 없다 IMF체제 직후부터 제2금융권 구조조정은 시작됐지만 은행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개혁정부라도 설마 은행간판까지야 내리겠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6월29일 동화 대동 동남 경기 충청등 5개 은행에 대해 퇴출명령이 내려졌다. 뒤이어 상업+한일, 국민+장기신용, 하나+보람, 조흥+강원+충북등 메가톤급 합병바람이 밀어닥쳤다. 금융을 만년부실의 늪으로 밀어넣었던 은행불사의 신화는 무참히 깨져나갔다.
위기의 7~8월 고용조정은 허용됐지만 「정리해고」는 언제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 심상치 않았던 「춘투」분위기는 마침내 8월17일 현대자동차 파업으로 현실화했다. 정부개입으로 파업은 한주만에 끝났지만 후유증은 컸다. 『노동불안이 경기회복에 장애로 대두되고 있다』(7.14 월스트리트저널)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강성노조가 외국인투자를 어렵게한다』(8.11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 능력이 의문시된다』(8.24 워싱턴포스트)등 한국을 보는 밖의 시각은 급속히 경색되어갔다.
현대차 파업이 나던 날 러시아에서도 비보(모라토리엄)가 날아왔다. 남미의 금융사정도 심상치 않았다. 면역력없는 한국경제로선 수만㎞밖에서 오는 충격에도 휘청댈 수 밖에 없었다. 발행 당시 3.55%포인트였던 외평채가산금리는 8월말 무려 10.10%포인트까지 치솟았다.
발빠른 수습 정부는 본격적 경기부양에 착수했다. 강력한 금리인하 드라이브로 실물경기회복과 금융·주식시장활황, 두마리 토끼몰이에 나섰다. 재벌들이 느슨해진다 싶으면 때때로 정부·재계 간담회를 개최, 채찍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1월부터 경기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모든 경제지표는 IMF 이전수준으로 복귀했다. IMF체제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얼룩」도 생겼지만 1년반의 개혁과 회복실험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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