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놓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사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박정희평가가 내려진지 오래고, 누가 뭐래도 그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현직대통령과 전직대통령, 박정희전대통령의 딸인 박근혜의원과 혁명동지인 김종필총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국민은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국민 대다수의 박정희평가에는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혼재해 있다. 하나는 그가 나라를 근대화시켜 가난을 몰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다. 특히 북한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북한 경제가 지금 엇비슷한 상황에서 헤매고 있다면 굶주림은 물론이고 남한에서까지 냉전적 폭압정치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달래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박대통령 시절에 경제발전의 틀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그의 통치스타일이나 개성에 대한 신화나 향수가 싹트는 것은 자연스럽다.
반면에 그 시절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고 있다. 『인권탄압은 아버지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박근혜의원의 말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 개발독재란 말로 함축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탄압이었다. 박정희평가는 조국근대화와 인권탄압이라는 두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기둥에 더 비중을 두느냐는 차이가 있을뿐, 국민의 평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박정희시대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政敵)이었고, 인권탄압의 가장 심한 피해자였던 김대중대통령은 지난주 대구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대통령은 한국전쟁이후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하고 정부차원에서 박정희기념사업을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화해 제안은 대구·경북의 민심을 얻으려는 정략적 제스처가 아니냐는 의심을 불렀고, 박정희 치적의 어느 한쪽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김대통령의 개인적인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개인적인 화해를 빛내기 위해 국민세금을 써서는 안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 논란에 김영삼전대통령이 개입함으로써 박정희재평가는 정치 가십으로 추락했다. 김영삼씨는 느닷없이 4·19국립묘지에 찾아가서 『오늘의 독재자 김대중대통령이 독재의 상징인물인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지역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술수』라고 공격했다.
그는 성명서에서 박정희유신독재와 맞서 싸운 자신의 경력을 나열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도 박정권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기인한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오늘의 상황은 4·19때와 같다』는 말까지 했는데, 이쯤되면 그는 이미 정치를 재개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전직대통령의 정치재개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현실인식이다. 그의 어휘와 표현력이 부족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많은 부분이 망발에 가깝다.
오늘 김대통령에게 퍼붓는 그의 공격은 대통령시절 자기자신도 많이 들었던 공격이다. 집권초에 여론의 높은 지지를 앞세워 개혁을 추진할때 그는 「법치」가 아닌 「인치」(人治)로 문민독재를 한다는 공격을 받았고, 표적사정이니 지역편중인사니 가신(家臣)정치니 하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가 갑자기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던 투지와 슬로건으로 「김대중독재」와 맞서 싸우겠다는 것은 뭔가 현실인식에 착각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정치인이 갈 수 있는 정점(頂點)이고, 가장 명예로운 자리인데,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명예를 스스로 짓밟고 있다.
『침묵은 금이다』는 말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이 금일 수가 있다. 김영삼전대통령에게 지금은 침묵해야 할 때다. 마음에 안들고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전직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전직대통령이 마구 행동하면 국민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진다.
환란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는 대통령으로서 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때에 침묵 이외에 무슨 할말이 있는가. 정치를 재개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건가. 그의 망발시리즈는 수의(囚衣)를 입고 있는 전직대통령들을 봐야 하던 때 못지않게 국민을 수치스럽게 한다.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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