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46~47년의 좌우합작운동은 지금까지 남한내 온건 좌우파간의 합작운동으로만 알려져왔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여운형(呂運亨)과 김규식(金奎植)이 남한내 좌우합작을 성공시킨 후 북한과 연합함으로써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점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던 와중에서 최소 3차례 이상 직접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金日成) 김두봉(金枓奉) 등과 10차례 이상 편지를 주고 받았다. 미군정의 정보보고에 의하면 김규식 역시 북한지도자들과의 협상을 원했다. 여운형이 암살될 당시 갖고 있던 손가방에서 그가 북한지도자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쏟아져 나오자 미군정은 감쪽같이 속았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찬사와 비판의 극단적 평가
남한내 좌우 합작→북한과의 협상→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여운형 김규식의 구상은 분단정부 수립이 가시화하기 이전 시기, 남북협상의 첫 시도로 기록된다. 여운형 암살 이후 김규식이 김구와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46년 5월부터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고 미군정이 개입한 좌우합작운동은 당대부터 찬사와 비판의 극단적 평가가 양립했다. 한편에서는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 섰던 한국현대사가 남긴 소중한 민족통일정신의 시도였다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려는 미군정의 공작정치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최초에 좌익과 우익 전체의 합작으로 추진됐던 좌우합작은 미군정의 공작정치를 우려한 박헌영(朴憲永) 등 좌익의 합작거부와, 토지개혁을 두려워 한 이승만(李承晩) 한민당 등 우익의 비토가 얽히면서, 온건 좌우파만의 합작으로 방향이 전환됐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의 출발 당시부터 깊숙이 개입했고, 좌익이 분열되기만을 기다렸다.
온건 좌우파들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익과 우익의 합작원칙을 절충한 독자적인 합작원칙을 발표(46년 10월7일)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군정의 희망대로 군정자문기관인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립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과도입법의원의 구성은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던 여운형 김규식과 온건파 양성을 통한 대중적 지지기반 창출을 노렸던 미군정 누구에게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과도입법의원의 선거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실패하자 여운형은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좌우합작위원회는 김규식 등 중간우파의 정치단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좌우합작·남북연합이라는 두 사람의 정치적 이상은 48년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졌다.
47년 8월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분단정부 수립이 현실로 대두하자, 김규식 홍명희(洪命熹) 이극로(李克魯) 등 통일·독립을 추진하던 중간파들은 민족자주연맹(47년 12월 20일 결성)으로 결집했다. 분단정부 수립 참가여부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김구가 48년초 단선(單選)·단정(單政) 반대로 입장을 정리하자, 남북간의 정치적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시도가 본격화했다. 김규식의 냉철한 이론과 역사적 경험이 김구의 민족주의적 추진력과 결합된 것이다.
48년 2월 김구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들의 정치협상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3월 북한은 김일성 김두봉 명의로 지도자간의 정치협상 대신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수정제안을 했다. 5월 10일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앞둔 남한 정계는 선거참여파와 남북연석회의 참여파로 양분됐다.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는 문화인 108인 선언 등으로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김구 김규식은 북행길에 올랐다.
남북연석회의 진행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는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두차례 남북지도자협의회, 두차례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4김회담 등으로 진행됐다. 김구 김규식은 최초의 주장대로 남북지도자들의 정치협상인 4김회담에 중점을 두었고, 북한은 연석회의라는 틀을 강조했다. 이후 북한이 대남 평화통일공세에 활용하는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역사적 연원이 바로 여기에서 기원했다.
미·소 양군 철수 및 단정·단선 반대 등의 결의문을 내놓은 연석회의가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는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됐다. 서울에 돌아온 김구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 결과를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북한은 사전 계획대로 남한정부 수립을 이유로 북한정권 수립을 추진했다.
북한은 두 사람에게 정권수립을 위한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48년 6월 29일~7월 5일)개최를 제안했다. 그러나 「통일없이 독립없다」는 두 지도자는 북한정권 수립을 위해 「차려진 잔치상」에 들러리 서기를 거부했다. 남북한 어느 한 쪽도 분단된 정부라면 참가하지 않겠다는 두 사람의 결의는 통일운동을 위한 통일독립촉진회의 결성(48년 8월 21일)으로 이어졌다.
민족통일의 시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연석회의는 여러가지 유사점이 있다. 첫째는 민족통일 시도의 첫 경험으로 역사에 기록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형식은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틀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이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다면, 남북연석회의는 분단정부수립 반대와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 둘에 대한 비판적 평가 역시 극단적이라는 점이다. 미군정의 술수에 놀아났다는 비판과 북한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혹독한 비판이 여기에 해당한다. 미군정이나 북한정권은 이들을 자신의 정통성 확보에 이용하려 했고, 이들은 결과에선 실패했지만 평화적인 통일·독립의 정신을 역사에 남기는데 성공했다.
지도자들의 비극적 최후
마지막으로 좌우합작·남북연합의 세 지도자 여운형 김규식 김구는 그들이 추구했던 통일·독립노선의 운명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여운형은 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직전 백주대로 파출소앞에서 암살됐고, 김구는 2년뒤인 49년 6월 육군 소위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규식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납북돼 50년 12월 평북 만포진에서 병사했다. 이들은 생전에 예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지만, 지금은 남북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현대사의 인물이 됐다. 물론 남북한의 강조점은 다르다. 남한에서는 여운형 김규식 김구의 좌우합작·민족통일 노력을 칭송하는 반면, 북한은 이들이 김일성의 「영도」하에 맺었던 유대 및 협력의 정신을 칭송할 뿐이다. /정병준(鄭秉峻·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鄭秉峻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92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 96년 박사과정 수료 저서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 95년), 논문 「1946~47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석사학위논문, 92년), 「해방직후 이승만의 귀국과 동경회합」(한국민족운동사연구, 97년), 「여운형의 좌우합작·남북협상과 김일성」(역사비평 여름호, 97년), 「해방직후 몽양 여운형의 노선과 활동」(한국현대사연구 창간호, 98년) 등
■연구자료
강만길 「좌우합작운동의 경위와 그 성격」(한국민족주의론 2호, 84년) 도진순(1948년 남북연석회의와 남한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동향」(국사관논총 11호, 94년)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91년) 송남헌「한국현대정치사 1」(성문각, 78년) 차상철「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지식산업사, 91년) 최상룡「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나남, 88년) 정용욱「해방 이전 미국의 대한구상과 대한정책」(한국사연구 제83집, 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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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협상 물꼬튼 2월서신과 3월서신
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이 북조선노동당 대표인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는 남북연석회의의 계기가 됐다. 김구 김규식은 이 「2월서신」을 통해 4김을 중심으로 한 남북 지도자들간의 정치협상을 제의했다.
북한은 「2월서신」을 받은 직후 정치위원회 확대회의, 북로당 중앙위원회를 개최, 남북연석회의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3월 25일 저녁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된 것이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고, 이와 별도로 김구 김규식에게 전한 편지가 바로 「3월서신」이다. 남북협상의 물꼬를 튼 「2월서신」과 「3월서신」의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김구 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48년 2월 16일)
「…아무리 우방 친우들이 호의로써 우리를 도와주려 한다 하여도 우리 자체가 지리멸렬하여 그 호의를 접수할 준비가 완료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접수할 수 있으리까. 그리하여 미·소공위도 성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금차 유엔 위원단의 공작도 하등의 효과를 거둘 희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그러므로 우리(김규식과 김구)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김두봉)과 김일성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이유가 있겠나이까…」
■김일성 김두봉이 김구 김규식에게 보낸 답신(48년 3월 25일)
「…당신들은 조국땅에 돌아온 후에 금일까지 민족입장에 튼튼히 서서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 나갈 수 있는 정확한 요강과 진실한 투쟁을 문헌으로나 실천으로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모스크바 3상 결정과 소·미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시켰습니다.
이제야 당신들은 청천백일하에서 조선국토의 양단, 조선민족의 분열을 책모하는 유엔 조선위원단과 미국사령관의 정치음모를 간파한 듯 합니다. 우리는 양위 선생이 제의하신 남북 조선지도자연석회의의 소집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어떤 조선을 위하여 투쟁하시려는지 그 목적과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석회의의 성과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유엔결정에 대한) 투쟁방법을 토의하기 위해 남조선 어떤 정당·사회단체들에게 남북회의를 소집하자는 서신을 벌써 보냈습니다.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는 48년 4월초에 북조선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동의합니다. 이 연석회의에 참가하는 성원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제의합니다.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로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등 15명과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이외 5명으로 예상합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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