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잘 넘기면 된다』 은행을 앞세워 재벌을 압박하고 있는 정부나, 개혁의 칼날을 피해 보려는 재벌의 공통된 입장이다. 물론 속내는 정반대다. 정부는 재벌이 채권금융기관과 합의한 재무구조개선약정의 충실한 이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반면 재벌은 금융제재등을 용케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계산. 이는 과거 정권에서 체득한 「생존의 법칙」이기도 하다.빅딜 또 할 것인가 과연 정부의 구도대로 올해를 넘긴다면 재벌의 「신(新)확장주의」가 중단될까. 청와대 당국자는 『재벌이 계획대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핵심역량을 경쟁력 있는 분야로 집중하면 경영행태가 달라지고 또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까지의 이행실적이나 추후 이행 스케줄을 감안할 경우 정부의 기대는 장밋빛에 가깝다. 일례로 지난 해부터 올 1·4분기까지 5대 그룹의 자산매각이나 자본확충등을 통한 자구노력은 21조1,000억원으로 당초 계획(27조3,000억원)의 81% 수준에 그쳤다. 올해 분기별 자구노력 목표치를 보면 현대그룹의 경우 51.7%, 대우는 무려 87%가 하반기 이후로 몰려 있다. 삼성그룹 역시 50%에 육박하고, LG와 SK는 72.9%와 89.1%에 이른다. 총선등 정치일정 상 하반기 이후 재벌을 이전처럼 강제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1년여만에 수습국면에 들어간 빅딜을 또 추진할 수 있을까. 정부는 비자율적인, 추가 빅딜은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현재 빅딜도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돼 불이행시 금융제재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완결」을 낙관하기 힘들다.
은행 제 역할하나 「국민의 정부」의 재벌정책 성패는 은행등 금융기관에 달려 있다. 5대 그룹의 빅딜이나 6대 이하 그룹에 대한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은 채권단과 해당 그룹의 자율적인 합의로 이뤄지게 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80년 중화학분야 투자조정, 91년 주력업체제도, 93년 업종전문화제도등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으로 재벌을 다스려 왔던(?) 과거 정권과는 차별화한 점이다.
문제는 미온적인 은행이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지난 달 정부·재계 간담회 당시 실토했듯 주채권은행들의 책임있는 역할이 미흡하다. 은행들은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의 방문과 금융감독원의 현장 점검, 최근 주의촉구 조치등에 따라 마지 못해 움직일 뿐이다. 물론 최대 고객이자 사실상 제2금융권을 장악한 재벌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은행측의 해명이다. 금융계 인사는 『당국은 5대 그룹의 재무구조개선약정 이행에 대한 점검소홀시 관련 임원진을 문책한다고 하지만 현재의 은행·재벌 관계상 「제재」로 적극적인 역할을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앞으로의 재벌 계열사들이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선단식으로 묶이는 대신 전략적 제휴, 네트워크형 조직구조, 지주회사 형태등 느슨하게 연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물산업은 물론 금융산업까지 장악하려는 재벌의 행태나 은행의 소극적인 자세를 보면 실현가능성은 미지수다.
제2기 공룡재벌시대에 맞는, 투명한 산업정책을 마련하는 한편 은행등에 힘을 실어주는 방안을 강구하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정희경기자 hk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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