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울음 터로다.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는 표현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명문장 한 대목이다.「좋은 울음 터」는,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기에 좋은 장소라는 뜻이다. 상상하기에 쉽지 않은, 그러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표현이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서, 끝간데 없이 드넓은 요동 벌을 처음 맞닥뜨리면서, 그 순간의 도저한 감회를 「좋은 울음 터」라는 감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울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도도한 울음 론(論)으로 그 뒤를 잇는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울음이 있지만, 진정한 울음의 백미는 「마치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한, 그래서 천지간에 꽉차, 듣는 이를 압도하는」그런 울음이다.
또한 울음은 슬픔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기쁨, 분노,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등 칠정(七情)이 모두 지극하면 울음이 된다. 가슴속에 가득찬 응어리를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데는 울음만큼 빠른 게 없다. 그런 울음은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웃음과도 본질이 다르지 않다.
연암은 폐부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금석(金石)이 광광 울리는 듯한 울음을 갓난 아기가 세상에서 처음 터뜨리는 「통쾌한 울음」에서 찾았다.
그 울음은 갑갑한 땅, 당파싸움만 해대는 나라, 백성은 도탄에 빠져도 제 한몸만 잘살겠다는 벼슬아치들, 학문을 출세의 방편으로만 여기는 지식인들, 제도와 이념에 묶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시계(視界)…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그 땅을 벗어나 일망무제(一望無際) 요동벌 앞에 서서 비로소 터뜨리는 외마디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암은, 이 글의 끝에서, 요동벌만 아니라 조선땅 안에도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기에 좋은 장소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하나가 금강산이다. 정확하게 금강산 비로봉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볼 때, 그곳이 좋은 울음 터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황해도 장연(長淵) 바닷가 금사산(金沙山)이라고 한다. 장산곶 백사장에 금모래가 산을 이룬 곳이다.
금사산은 모르지만 금강산이라면, 바로 요즘 그곳에 다녀 온 이들로부터 관광소감을 자주 듣는 이름이다. 13일로 금강산 관광선이 100번째 출항을 기록했다고하고 그동안 6만4,000여명이 금강산을 올랐으며, 14일부터는 배가 매일 떠나게 돼, 연말까지는 20만명이 다녀 오리라고 한다.
다녀온 사람들의 말은 『과연 절경!』이라는데 대부분 일치한다. 비로봉 정상은 못 올라도, 그곳이 「좋은 울음터」라는 연암의 말을 이해할 만하다. 「관광」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할 것이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 한 가지가 더 있다. 철벽 같이 막혔던 금단의 땅을 이렇게라도 뚫었다는 감동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절경이어서만이 아니라, 그 땅이 이 겨레 모두의 명산이요 고향이기에, 금석에서 나오는 듯한 큰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은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한 응어리를 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울고 싶어도 크게 울음을 터뜨리지 못해서 가슴의 병을 덧치는 사람들이다. IMF이후 대거 몰락한 중산층이 아마도 그 대표적인 계층이다.
그러나 정말로 울고 싶은, 그래서 「좋은 울음 터」가 아쉬운 사람들은 이 주말 스승의 날을 반납한 「우리들의 선생님」들이다.
언젠가부터 「촌지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굴욕적인 현수막을 교문에 내걸어야 했고, 「스승의 날에는 학교에 찾아오지 마시라」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야 했으며, 정년 단축에 연금 불안까지 겹쳐 무더기 명퇴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교단에서 교장선생님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저항」이 스승의 날을 스스로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요즘은 없어졌지만 TV의 국군위문 프로에서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는 장면들의 모습과, 오래 헤어진 사람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TV프로에서 어렸을 적의 은사를 붙잡고 『선생님~』 목이 메이는 장면은 언제나 눈물겹고 아름다웠다. 자, 잃어버린 스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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