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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혼의 여러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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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혼의 여러 얼굴

입력
1999.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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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갔을 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3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1년안에 당신을 따라 갈테니 안심하고 먼저 가있어요」라고 약속하셨단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3년이나 산다면서 아버지는 늘 민망해 하셨어. 심장병이 악화되어 회복될 것 같지않자 아버지는 치료받기를 거부하고, 응급실로 실려가 그대로 영안실에 가게 해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하셨어. 그래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이틀을 지내고 세상을 떠나셨단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사이좋기로 유명했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어머니는 곧장 동대문시장에 가서 장을 봐다가 점심상을 준비하는 생활을 한평생 계속하셨다고 한다.

점심약속이 없는 날은 집에 와서 아내가 만든 음식을 드는 것이 아버지의 즐거움이었다. 아버지는 대기업을 일군 분인데, 다른 재벌들처럼 바람을 피우지 않고 아내만을 사랑한 이야기여서 더욱 아름답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80대까지 해로하다가 헤어지면서 『1년안에 당신을 따라갈테니 안심하고 먼저 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결혼에 성공했을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성공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한평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고 또 그와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해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봉합할 수 없을 만큼 갈갈이 찢긴 결혼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우선 천생연분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천생연분을 완성시키는 것은 운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공동생활에 적응하면서 사랑을 지키고 가꾸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0대에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50대 60대인 오늘도 자동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철모르던 20대에 한 결혼의 약속을 평생 지키라는건 무리예요』라고 한 선배가 말해서 모두가 웃은 적이 있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사실 옳은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젊은이들이 인생의 눈과 비에 대해서 짐작이나 하겠는가.

이혼소송을 낸 76세의 할머니가 지난 1월 패소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남편(83)의 인색함과 의처증 등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여 1심에서 승소했으나,

2심은 『할아버지의 문제점들이 인정되지만 52년의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할만한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할머니는 오히려 고령에 의한 정신장애 등을 보이고 있는 할아버지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면서 이혼을 허가하지 않았다.

해로하고 싶지 않은 아내에게 고령을 이유로 해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법의 횡포라는 주장이 나왔고, 여성단체등이 할머니의 이혼할 자유를 지지하고 나섰다. 최근 크게 늘어나고 있는 노년이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불행을 견디며 살아왔으니 얼마 안 남은 여생도 꾹 참고 살라는 충고는 비인간적이다. 얼마 안남은 여생인데 이혼하여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할머니의 입장에 오히려 동정이 간다. 그러나 결혼에는 또 다른 얼굴도 있을 수 있다.

참기 힘든 고통으로 이혼의 문턱에서 번민하다가 결혼을 깨는 대신 유지하기로 마음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용서할 수 없는 배신까지도 인생의 눈과 비로 받아들여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평화로운 부부로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결혼의 완성」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한평생을 봄처럼 따듯하게 보낸 부부도 아름답지만,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며 투쟁하고 인내하고 마침내 바다처럼 흘러가는 부부도 아름답다.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면서 가정의 기초인 결혼에 대해서 각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혼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나의 결혼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떤 얼굴로 굳어져가고 있을까, 가끔 거울을 봐야 한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과 함께 부부의 날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자고 있다면 누구든 먼저 손을 내밀어 사랑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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