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사상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출범 이후 세계의 주류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세계화와 무국경(無國境)시대에 대해 말해 왔다. 물론 이에 관한 구(舊)좌익적 소수파의 항의도 계속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세계화란 「환상」이고 실은 선진국 금융자본에 의한 후진국 수탈체제의 강화과정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는 덫이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 주장은 비관적이다. 이것과 대비되는 신우익적 극단에서는 선·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세계화 과정에서 국경이 완전히 소멸하는 한편, 국민국가가 무력화되어 일국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극소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은 세계화의 진상은 제3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두뇌중심의 지식기반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후진국의 인력과 자원을 경략할 필요가 없어졌고 남북무역은 가파르게 퇴조하였다. 후진국들은 「소리없이」 주변화한 것이다.
세계무역의 대부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역내무역인 오늘날 선진국은 후진국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선진국의 이 무관심을 목도하면서도 선진국이 세계화를 통해 후진국을 노린다는 구좌익적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세계화는 일차적으로 OECD 국가군과 신흥산업국가 등 40여개 주요국가간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현상이다. 이 국가관계에서 특히 금융분야의 국경은 분명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기타 경제분야에서는 국경이 소멸하기보다는 「변형」되고 있고 사회·정치영역에서 이 「변형」은 더욱 뚜렷하다.
가령 우리는 항만검역소 및 보건정책, 교육·복지·정보화정책 등 정부정책이 실효성을 잃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다. 「무국경」과 「국민국가 해체」라는 말은 분명 과장이다.
진상은 세계적 업무와 일국의 대내업무가 새로운 분업관계로 재편되는 추세이다. 국민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다. 세계적 업무를 공동으로 관장하는 유엔, WTO, IMF 등 「세계관리기구들」이 그간 5,300여개로 급증하였다.
종전의 국민국가들이 독점하던 많은 업무들이 획기적으로 「세계화」되었다. 또한 세계적 여론매체의 등장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5만여개의 시민단체(NGO)들의 폭증으로 「세계시민사회」가 시야에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개별국가들은 수많은 차원에서 사방팔방으로 연계되었다.
이로 인해 국경은 「프런티어」로, 국경을 신성시하던 영토국가는 「프런티어국가」로 변형되고 있다. 각국의 정부, 기업, 시민들은 그들의 지리적 활동기반을 어디에 두든 세계적 활동과 영향을 미치는 한편, 국경을 잊고 상호 연계되고 경쟁하고 협력한다.
가령 청소년들조차 안방에 앉아 컴퓨터게임의 세계적 프로기사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안과 밖을 가르는 고정적 영토계선(界線) 상의 폐쇄적 잠금장치로서의 국경은 빠르게 「프런티어」로 변형되고 있다.
여기서 프런티어는 활동주체들이 분야별로 진출·개척하는 탈(脫)지리적, 추상적 「개척방면」을 뜻한다. 이 「프런티어」는 안팎의 구분이 애매하고 유동적·가변적이다.
탈지리적인 「프런티어 국가」시대에는 영토적 소국도 세계를 자신의 프런티어로 삼는 초강국이 될 수 있다. 가령 인구와 영토가 우리보다 현격히 작은 네덜란드는 생명공학적 종자개량과 화훼생산 분야에서 세계를 프런티어로 지배하는 초강국이다.
우리도 지식기반 산업시대에 우리의 두뇌를 창의적으로 활용한다면 어떤 특정분야에서 필경 만주와 시베리아, 나아가 세계를 프런티어로 활동하는 초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정된 모든 것이 유동화하고 고착된 모든 것이 해소되는 프런티어 시대에 세계화를 낡은 시각으로 비관하거나 앉아서 낙관하는 것은 둘다 금물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분야에서 독보적인 한국형 프런티어 초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분발, 창의적 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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