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길」은 달콤한 환상인가? 지난해 말부터 한국 지식사회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가 제3의 길이다. 영국 사회학자며 현재 블레어 정권의 이데올로그로 자처하는 앤서니 기든스의 책 「제3의 길」이 번역되고, 그가 방한까지 하면서 이 담론을 유행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5년동안의 통치 위상과 방향을 정립해야 할 새 정부의 관심과도 맞아 떨어졌다.90년대 이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보았던 대다수 지식인들이 기든스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에 호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좌파의 평등이념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이념을 결합시키고, 이것을 세계민주주의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은 그럴 듯하다. 우리 정부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결합시킨다는 문제 의식을 제3의 길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3의 길」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이념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그 길을 따른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블레어 정권은 기든스의 「환상」을 실천에 옮기지도 못했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따가운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제3의 길은 없다(The Third Way Is Wrong)」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이 블레어 정권의 1년 6개월 공과(功過)를 검토하기 위해 쓴 글을 모은 책.
영국의 좌파지 「마르크시즘 투데이」는 91년 12월 폐간됐다. 하지만 그동안 목소리를 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은 블레어 정권이 들어선 뒤 소리쳐 외치는 「제3의 길」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폐간 후 7년만에 한 차례 특별호를 내기로 했다. 지난해 말 나온 특별호는 블레어의 정책과 제3의 길이 얼마나 허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개인주의로 포장했지만 블레어의 정책이 노동자 계급의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딛고 서있는지, 갈수록 계급 갈등을 증폭시키는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문화연구가 스튜어트 홀, 데이비드 헬드 등 14명의 글이다.
비판의 초점은 블레어가 현실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우회를 개혁의 기본전략으로 삼고, 구조적 모순을 낳는 세계화의 불균등화를 외면한다는 데 있다. 제3의 길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이라고 설명할지라도, 실제로는 자유주의의 비중이 극도로 무겁다는 결론이다. 전세계를 떠도는 「제3의 길」은 아직 현실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에 그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제3의 길을 「창조」하려는 권력층 지식인들이 한번쯤 펴들어야 할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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