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생활] "통기타 하나들고 행복의 나라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생활] "통기타 하나들고 행복의 나라로"

입력
1999.05.07 00:00
0 0

 - 포크의 아주 특별한 해후 양희은-한대수 인터뷰 -#1

68년 어느 날 서울 명륜동 버스 정류장. 한 여고 2년생은 블루진 상하의에 긴머리, 창백한 옆모습의 남자를 보았다. 제임스 딘 같았다. 소녀는 태어나서 그렇게 머리가 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2

70년쯤인가. TV에서 그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여전한 장발의 그가 2년 전의 그 남자였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3

다시 3년 뒤 가수가 된 여자는 PD의 주선으로 그의 노래를 취입했다. 「행복의 나라로」. 그리고 75년 그의 사직동 신혼집을 찾았다. 사과 궤짝에 외국 잡지를 더덕더덕 붙인 독특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여자는 마음 속의 오랜 우상과 드디어 해후했다.

한국 포크의 역사를 말하자면 한대수(51)와 양희은(47)은 각각 남녀 대표 선수다. 68년 미국에서 돌아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발표, 독특한 사운드와 가사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금지 가수」로 더 이름이 높았던 한대수.

그리고 서정적 목소리의 「아침이슬」로 세월이 가도 여전한 음색을 전달하는 양희은. 양희은은 그의 공연에 한대수를 초대, 5~9일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특별한 만남」이란 제목의 콘서트를 갖고 있다.

한대수는 양희은을 두고 「음악적 부부」라고 가끔 말한다. (93년 양희은이 한대수가 살고 있던 미국에서 귀국한 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한대수가 다른 가수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서는 것은 처음이다)

◆서로를 말한다

양희은이 보았던 한대수는? 『그 때만 해도 한국 가수들의 포크란 한결 같이 외국 번안곡이었다. 웨딩케익, 하얀 손수건…. 그래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통기타 치고, 하모니카 연주하는 형은 전설이었다』

한대수가 보았던 양희은은? 『목소리가 정말 맑았다. 그런데 그 맑음에 갈증같은 것, 만족되지 않는 애달픔 같은 것이 서려있다. 양희은이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유명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포크의 정신은?

한 포크의 정신은 자기 기타로 자기 음악, 자기 세계관을 자기 자신에게 노래하는 것이다. 개인적이고 사실적인 언어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포크다.

양 그것이 결코 개인적이란 말은 아니다. 가령 월남 갔던 삼촌이 돌아오지 않았다 치자. 그것은 개인사이자 동시에 사회사이기도 한 것이다.

한 개인적 아픔(Private Pain)이 시대의 아픔(Public Pain)이 되는 것이다.

◆요즘의 대중문화에 대한 생각

양 신문방송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문화는 젊은이들이 리드해왔지만 중장년, 50·60대가 산맥처럼 버텨 주어야 한다. 왜 10·20대 취향으로만 획일화하는가. 장삿속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한 대중을 리드한다는 모험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적인 상업화 경향,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음악적 반찬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양 가끔 여성팬을 만나면 『저 양희은씨 참 좋아했었어요』라고들 말한다. 과거형이다. 길에서 산 병아리 한 마리도 먹이와 사랑을 주어야 자란다. 하물며 대중문화는 말할 것도 없다. 대중이 사랑을 주어야 문화가 자란다. 스스로의 문화를 키우는 일은 대중과 가수의 공동작업이다.

두 사람은 그리고도 많은 말을 나누었다. 양희은은 속사포처럼 말했고, 한대수는 주로 양희은의 말에 수긍하는 듯 『그럼』 『그렇지』 추임새를 넣었다. 금지곡인 된 「고무신」복각 앨범을 낸 한대수는 8월을 목표로 6집 음반을 작업중. 인생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보낸 그는 이제 한국을 좀 더 자주 찾을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열정으로 살아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20세 이상 연하인 러시아인 아내 록산나에게서 문화적 차이를 느낀다고 했다. 그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비아그라를 먹어대느라 바쁘다고 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48년 부산 출생, 58년 미 뉴욕으로 이주 후 3년만에 귀국, 62~64년 경남중·고교, 65~68년 롱아일랜드서 고교 졸업후 뉴햄프셔대학서 수의학 전공, 68년 「물좀 주소」 발표, 70년 군입대, 이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영자신문기자겸 사진작가, 시인으로 활동.

음반 「멀고 먼 길」(74) 「고무신」(75) 「무한대」(89) 「기억상실」(90) 「천사들의 담화」(91) 「1975고무신 1997 후쿠오카」(99)

52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서강대 사학과 졸업, 71년 YMCA 「청개구리」에서 첫 콘서트, 72~80년 CBS 청소년대상 팝프로그램 진행, 75년 제4회 대한민국 가수상, 300여회 공연 10만여 관객 동원.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