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간첩 리철진] 간첩의 눈에 비친 '이상한 사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간첩 리철진] 간첩의 눈에 비친 '이상한 사회'

입력
1999.05.07 00:00
0 0

특수공작원으로 훈련받은 남파간첩 리철진(유호성). 그의 과업은 굶주린 인민의 배를 불릴 수 있는 슈퍼돼지 유전자를 훔쳐가는 것. 『좀더 거창한 혁명사업을 수행할 줄 알았는데, 겨우 돼지종자 도둑이라니』그러나 남한 사회에 첫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바보가 된다. 간첩보다 더 무서운 택시 떼강도를 만난다. 공작금을 기다리다 헛물만 컨 고정간첩 오선생(박인환)집에 얹혀지내기 일주일.

리철진은 「이상한 나라」를 경험한다. 자기 가방을 강탈한 택시강도들이 오히려 간첩으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오선생은 청소년폭력상담소 소장인데 그의 아들은 학교에서 주먹으로 「짱」이 되고 싶어 안달이다.

괴롭히던 건달을 총으로 죽인 택시강도는 김재규의 말을 빌어 『나 개인의 행복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다』고 큰소리 친다. 파출소에서 『나는 간첩』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러면 나는 김정일』이라며 믿지 않는 경찰. 사람을 나무에 묶어놓고는 「퍼포먼스」라고 좋아하는 예술가들.

리철진이 직업정신을 살려 슈퍼돼지 유전자를 구해 돌아가려는 순간. 당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그동안 자존심이 상해 거절하던 남한 정부의 유전자 제공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당으로서는 갑자기 쓸모 없어진, 아니 존재가 알려지면 안되는 우리의 리철진. 그는 죽어야 했다.

간첩 리철진은 우리 사회를 보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비정상」을 꼬집는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버린다. 그는 소리친다.

『너희들은 돈만 주면 다 하잖아』 『적어도 당신들처럼 거짓말은 안해』라고.

오선생의 딸 화이(박진희)는 이별의 눈물을 흘릴만큼 착하고, 자기 직업에 충실하려는 사람이었으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역학관계에 희생당하는 가여운 젊은이다. 화이도 말한다. 『간첩이 뭐 죽어 지옥가는 사람도 아니고. 여기 겁나는 것이 얼마나 더 많은데』

유일한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우습고도 슬픈 우화. 처음 택시를 타고 「구토」를 하는 장면부터 마지막 간첩의 몸값인 포상금 1억원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모습까지 「간첩 리철진」에는 재치와 유머와 따뜻함이 넘친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가지는 역설, 예상 뒤집기, 어이없는 상황의 충돌로 드러나는 일상의 리얼리즘과 예사롭지 않은 풍자. 한국영화로서는 분명 새로운 발견이다. 15일 개봉. /이대현기자 leedh@hk.co.kr

- 이성욱(영화평론가): 한국영화 여기까지 왔다. 충무로여 반성하라.★★★★

- 양윤모(영화평론가): 이것이 훌륭한 코미디다. ★★★☆

★5개 만점, ☆은 1/2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장진 감독의 말

『진지하게 작업했고, 하고싶은 말도 다했다. 간첩 이야기지만 전혀 정치적색채나 이데올로기를 배제했다. 간첩이란 「직업」을 가진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웃음에 대한 강박관념도 버렸다. 오히려 절제했다.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이 이탈한 표현양식이라면 「간첩 리철진」은 일상 속의 웃음과 아이러니와 휴머니즘을 배열한 사실주의다. 때문에 간첩 눈에 비친 남한사회의 풍자도 과장하거나 잡다하게 나열할 필요가 없었다. 고정간첩 오선생(박인환)가족으로 충분히 비춰졌으리라 생각한다. 본대로 느낀대로 편하게 따라가다 보면 재미도 있고, 가슴도 아픈.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 분단현실이 아닌가』

연극 「허탕」 「택시 드리벌」 「매직 타임」의 연출과 희곡 등 기발한 아이디어와 웃음으로 「천재성」을 인정받은 장진(28)감독.

그런 그도 첫 영화는 망쳤다. 「영화」란 틀을 몰랐기 때문에. 시행착오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감독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단 두번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대현기자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