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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8·15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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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8·15 해방

입력
1999.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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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해방직후 美접촉 치안권회수 기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수립

1945년 8월 초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태평양전쟁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감지, 종전 후 조선 안에 일본인의 안정적 귀환대책을 수립해야만 했다. 해방전 국내에 있던 몽양 여운형은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조선총독부와 치안유지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기구는 해방 직후 20여일간 힘의 공백기에 주로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마지못해 정권을 넘겨주었던 일본은 미군과 접촉해 치안권을 다시 회수하려고 기도하는 등 한국인들의 온전한 해방을 끝까지 방해했다.

◆기형적인 해방

8월 28일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은 미국의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질서를 교란하고 있으므로』 치안유지의 권한을 일본측에 확립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맥아더는 『우리 군대가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질서유지 권한을 귀측에 부여한다』는 해답을 보냈다.

9월 1일 조선관구 사령관 코오즈키요시오(上月良夫; 17방면 군사령관)는 『조선 안에는 법질서 파괴로 덕을 보려는 공산당과 독립운동가들이 많고 그 때문에 태업이나 폭동이 있을 것이 예상된다』는 의도적 보고를 미군에 보냈다.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하지(John R. Hodge)중장은 일본군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 『조선 안에서의 법과 질서유지를 위해 미군 진주 후에도 일본군을 이용하거나 그 무기를 사용할 것』을 맥아더에게 요청, 승인받았다. 해방은 되었지만 「총체적 해방」을 맞이하지는 못한 기형적 상황이 미군 진주 이전의 역사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중권력의 시기

일본인은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자신들의 이익보전을 위한 공작을 성공시켜 미군의 계속적인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한국인을 정권이양의 과정에서 배제시키는데도 성공했다.

한국인은 해방된 후에도 주권을 쟁취하지 못했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순을 감내해야만 했다. 당시 한국을 지배했던 총독부에 태극기가 게양된 적은 하루도 없었으며 일장기가 내려진 후 바로 성조기가 올라갔던 것이다.

이는 해방을 전취(戰取)하지 못한 한국인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이었다. 건준이 통치하려고 노력했던 20여일간은 일본군의 훼방에 의해 「이중권력의 시기」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려 진주한다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오히려 적국에 진주한 점령군의 행태를 보였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기 직전 건준 대표가 선상으로 마중 나가 자기 그룹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했으나 미군은 이들의 의견을 청취만 하였을 뿐 정책에 반영시키지 않았다.

오키나와 상륙 작전 때의 피해를 의식한 미군은 무선연락을 통하여 일본군에게 인천 서울지역의 통행금지와 이 지역 경비 등에 관해 지시했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에 들뜬 한국인들은 해방군의 입성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결국 일본군은 인천에 환영 나온 인파를 데모대로 오인해 경비상의 이유로 총격을 가했다.

2명의 한국인이 사살되었으나 오히려 이같은 상황은 미군에 의해 정당화됐다. 미일간의 흥정에 의해 판도가 결정되었던 한국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출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9월 9일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우선 총독부에서 항복문서의 서명을 받았다.

한국은 해방됐지만 정권은 일본과 미국간에 교환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이후 미군정의 통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이어졌다.

◆불완전한 해방론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 모두에서 주는 이미지처럼 한국인들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만든 역사적 계기였다.

그런데 8.15가 우리가 기념하는 바와 같이 「압제로부터의 해방」이며 빛을 다시 찾은 「광복」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미국의 역사연구가 브루스 커밍스는 「부정된 해방」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보다 급진적인 역사 해석에 의하면 8.15는 일본 제국주의에서 또 다른 제국주의로의 지배자 교체에 불과하므로 전혀 해방이 아니며 일본의 퇴각과 미소의 등장만을 가져온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은 8.15후 독립정부인 유일 합법정부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므로 광복절로 기념할만 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급진적 역사관과 공식 입장의 중간쯤에 「불완전한 해방론」이 있다. 이 주장을 채택하고 있는 논자들은 해방의 역사적 계기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새시대의 개막과 전환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8.15후 분단이 되었으므로 해방은 불완전한 상태로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런 견해를 종합해보면 해방된 조국에는 당연히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가 수립되어야만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오히려 미소 분할의 직접지배가 행해졌으며 1948년 이후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급진적 역사관은 분단시대를 외세의존적 식민사회의 연장으로 바라보는데 비해 불완전 해방론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독립성은 인정한다. 냉전시대의 해체와 더불어 급진적인 역사인식은 설득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광복론과 불완전한 해방론이 대립하고 있다.

◆분단의 역사적 계기

그렇다면 과연 8.15 해방은 왜 분단의 역사적 계기가 되었을까? 우선 근본적으로는 연합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우리 민족이 일본에 맞서 해방을 싸워서 얻어낼 수 있었다면 연합국의 선물인 8.15해방이 오기 전에 자주적인 해방을 전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해방의 타율성」은 해방이 분단으로 전화하는데 있어 직접적 요인은 아니며 근원적 요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분단의 직접적인 책임은 역시 한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분단을 강요한 외세에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그렇지만 국내정치세력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국내정치세력이 단합할 수 있었다면 연합국에 의해 사분됐으나 통일을 달성했던 오스트리아의 경우처럼 통일됐을 가능성도 있기때문이다.

한국은 독일의 경우처럼 핵심적인 이익이 걸려 있었던 중심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분단을 강요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물론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분단을 원하지 않았지만 일부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 너무 강했으며 분단반대세력의 힘이 제한적이었던 데에도 요인이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 각각의 분단지향적인 정치세력과 외세는 서로의 힘을 상호상승시켜 분단으로 가는 힘을 증폭시켰다.

외세와 민족내부의 세력이 상호작용해 분단구조를 산출한 것이다. 국내정치세력이 단합하지 못했던 근본적 요인은 식민지 시대 이래 독립운동세력의 지역적 분리와 이념적 분열에도 있다할 것이다.

/이완범(李完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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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해방 연표

1999/05/03(월) 16:55

45.7.18~26 포츠담회담(미소 한반도 군사적 경계선 논의)

45.8.6 미국 히로시마 원폭 투하

45.8.8 소련군 대일 선전 포고

45.8.10 일본 항복의사 연합군에 타진

45.8.15 광복(일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연합국, 일반명령 제1호 발포(38선을 중심으로 한반도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이 점령)

45.9.2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 38선 경계 미소 양군의 한국분할점령 발표

45.9.6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언

45.9.7 미 극동군사령부, 남한에 군정 선포

45.9.8 미 하지 중장 휘하 미 24군단 인천 상륙

45.9.16 한국민주당 결성

45.9.19 서울에 미 군정청 설치

45.11.23 김구 등 임정요인들 1진 귀국

45.12.12 하지 중장, 조선인민공화국 비합법적이라고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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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이완범 정신문화연구원 조교수

◇약력

▲83년 연세대 정외과 졸 ▲86년 동 대학원 석사 ▲94년 동 대학원 박사 ▲92~96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97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조교수

◇저서

「한반도 분단의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_미국과 국내정치세력의 역학관계,1945~1948」, 「미국의 점령정책과 한국, 1945~194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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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 미소 '포츠담 밀약설' 비밀문서 확인

북위 38도선은 미국이 단독으로 미국방부에서 그은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에 의해 포츠담에서 획정됐다는 새로운 사실이 미국방부 해제 비밀문서 발굴로 처음 확인됐다. 이 자료들은 38선 획정이 당시 미·소가 사전협의한 「정치 행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지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공동으로 연재중인 주간시리즈 「현대사 다시 쓴다」에 참여하고 있는 이 연구원의 이완범(李完範)교수는 이같은 사실을 밝힌 당시 미육군부 작전국장 헐 중장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미국방부 해제 비밀 문서와 지도를 최근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 3일 공개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38선은 지금까지 통설로 알려진 45년 8월11일보다 보름 넘게 앞선 7월25일께 미 육군부가 아닌 포츠담에서 당시 번스 미 국무장관 지시에 따라 헐 중장에 의해 획정됐다.

기존 학계에서는 38선이 헐 중장 직속 부하인 육군 작전국 전략정책단장 린컨 준장의 지시로 본스틸_러스크(후에 미국무장관) 두 대령에 의해 45년 8월 11일 오전 2~3시께 미 국방부에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즉석에서 그어졌다는 게 정설로 통했다.

이교수가 발굴한 비밀자료는 미 육군 전사실(戰史室) 소속 해리슨 대령이 49년 6월17일 헐 중장을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문서의 첫 문장은 「38선은 포츠담에서 획정됐다. 번스(미 국무장관)는 포츠담 회담(45년 7월 17~8월 2일)에서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할 것을 원했다」라고 기술돼 있다.

그동안 「포츠담 밀약설」을 주장해 온 서울대 신용하(愼鏞廈·사회대학장) 교수는 『이 자료들은 남북 분단이 미·소의 비밀 합의에 의해 포츠담회담에서 묵계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최초의 결정적 증거』라고 평가했다.

/서사봉기자 ses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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