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전화로 죽고 싶다고 했다. 어디 가면 총을 살 수 있느냐고, 총을 사고 끝장을 내고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다고 했다. 실연과 배반의 슬픔에 빠져있는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나도 그러고 싶은 적이 있었노라고 말함으로써 한가닥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무심히 청량리 근처를 지나는 길인데 도로 표지판에 화살표와 함께 쓰여진 휘경동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휘경동 286_326이라는 번지가 생각났고 그 숫자를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이었다.
내 옛 주소조차 기억못하는 내가 그 숫자를 기억하다니. 그곳은 내가 생각한 천사가 사는 곳이었고 오래 전에 수도 없이 편지를 썼지만 한번도 부치지 못한 짝사랑의 번지수였다.
「간절히 총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어찌어찌 그 생각을 잊었는지 모른다/…/한때 천사였던/한때 덤불찔레였고 한때 폭약이었던/그가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지금 내 마음 속에 없고/돌 속에도 폭풍 속에도/없다/그는 그가 사라진 줄을 모른다/바보처럼 한 때 천사였던 것도 모른다/너무나 깊숙이 사라졌기에/버려진 폐광의 속을 캐고 캐도/그는 이제 없다/…그를 파낼 유일한 광부인 나조차 사라지면/그는 아예 없었던 게 된다/그가 잠시 찬란한 천사였던 걸/증거할 자도/세상 천지도」(「천사」중에서)
천사는 내 기억 속에서만 산다. 천사조차도 자신이 천사인 걸 모른다. 기억을 파낼 유일한 광부는 나뿐이고 나의 사라짐과 함께 천사도 세계도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끊임없이 날아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기억은 때로 천사와 함께 나를 증거한다. 천사가 존재하는 세계만이 내 존재의 유한함을 견디게 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억 속에 한 천사가 있어 나를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은.
/시인·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제10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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