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암흑기인 1923년 5월1일. 서울거리 곳곳에서 어린이들의 함성이 울려퍼지며 전단이 뿌려졌다. 『오늘은 어린이날, 희망의 새 명절.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들을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 선포식이자 어린이헌장의 출발이었다.올해는 당시 어린이날 제정을 주도했던 소파 방정환(1899~1931)선생탄생 100주년.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쓰고 한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다간 그의 굵은 족적은 가족이 해체되고 교육이 황폐해지는 오늘날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서른 두 해의 짧은 삶이었지만 영원한 어린이의 벗으로 남은 「방뚱뚱」. 『어른이 뿌리라면 어린이는 싹이다. 뿌리는 싹을 위해 주어야 나무(운수)가 뻗는다』고 강조했던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운동가이자 애국계몽활동가였다.
소파의 어린이 사랑정신은 한마디로 어린이를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다. 그는 봉건적 가정에서 소외되고 천대받던 「애새끼」「아이놈」을 「어린이」로 바꾸고 경어를 쓰면서 어린이들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강조했다. 어린이들이 보고 즐길 거리를 만들어 주기위해 소파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만들어내고 「어린이」등 각종 잡지를 펴냈다. 어린이와 가까워지기 위해 전국을 돌며 벌였던 동화구연에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소파와 같이 활약하던 윤극영(작고)씨는 생전에 『한 팔을 들어 먼 데를 가리키며 슬퍼도 하고 작은 눈을 크게 뜨는 양 흘기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두 손길을 모으며 원망스러운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의 화술은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희망과 호소의 물결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야기가 재미있어 아이들이 오줌이 마려워도 자리에서 뜨지않고 고무신에 쌀 정도였고 소파도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바지에 소변을 싸기도 했다. 소파의 장남 방운용(方云容·81·한국방정환재단감사)옹은 『매일 밤 밖에서 돌아오시자 마자 다음날 이야기소품을 만들기 위해 방안 가득히 종이, 풀, 가위를 늘어놓고 끊임없이 궁리하는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소파의 어린이사랑」은 어떻게 봐야 할까. 「어린이」지를 통해 등단한 아동문학가 윤석중 새싹회회장은 『어린이들의 외적 조건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지만 정신적인 싹은 아직도 짓밟히고 있다』며 『어른들은 어린이날 하루 선물 사주고 놀아주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씨는 『아이들을 너무 떠받들어 「공주병」「왕자병」환자로 만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며 『물질보다는 정신을 살찌우는 절제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린이단체에서는 소파탄생일(11월9일)을 앞두고 소파의 삶과 행적을 찬찬히 돌아보기 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조직위원회(위원장 김봉호 국회부의장), 남북어린이어깨동무 공동육아연구원 어린이도서연구회등 3개단체가 조직한 「새천년어린이선언위원회」(공동대표 윤석중등 3인), 한국방정환재단(이사장 이동원 국회의원)등이 별도로 5일까지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친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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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소파는 누구...
1899년 11월9일 서울 야주개(현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유년때는 유복했지만 부친의 사업실패로 학창시절은 불우하게 보냈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대에서 아동문학 등을 공부했다.
1917년 천주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 용화(91년 작고)씨와 결혼하며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나섰다.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찍다가 걸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그는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어린이교육에 있다고 믿고 어린이운동에 뛰어들었다. 아동문학가와 어린이운동가로서의 활동은 22년 번역동화집「사랑의 선물」을 내면서부터 시작했다. 그후 장·단편동화 9편, 동시 10편을 발표했으며 23년에는 「어린이」지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발족했다.
아동문학가 신현득씨는 『소파는 육당 최남선이 발간했던 「소년」지가 중단된 이후 아동문학을 개척, 본궤도에 올려놓았다』며 『특히 「어린이」지를 통해 윤석중 이원수 윤복진씨등을 발굴함으로써 한국아동문학의 꽃을 피게 했다』고 평가했다.
세계아동미술전람회 전국순회강연 동화대회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과로로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 1931년 7월31일 타계했다. 78년 금관문화훈장, 80년 건국포장(애국장), 90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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