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노조가 8일만에 파업을 철회했다. 여론과 정부의 압력에 백기를 든 얻은 것 없는 패배였다. 파업기간 중 잦은 사고와 단축운행으로 불안해하던 시민들은 밝은 얼굴로 그 소식을 들었다.『불법파업을 법대로 다스리겠다』는 단호한 자세로 일관했던 정부와 서울시는 파업철회를 반기면서 새로운 노동문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5월 노동대란설」의 먹구름도 상당부분 걷힌듯 하다.
그러나 한편에서 지하철노조나 민노총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고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사정위가 깨지든 존속하든 간에 현실적으로 노사정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노조나 노총의 지도력에 회의가 일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번에 민노총이 지하철·한국통신·금속노조 등의 파업을 연이어 강행하려 한 것은 집단이기주의라는 도덕적인 차원 이전에 정세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에서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들이 내세운 요구사항은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중단할 것, 임금삭제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감원을 억제할 것,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기업이 지불할 것 등 3개항이었다. 그러한 요구들은 명분도 설득력도 없었고, 그들이 과연 오늘의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있느냐는 의문을 품게 했다.
지난 1년 동안 200만명이 직업을 잃었고, 실직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봉급생활자가 감봉을 감수했다. 이런 와중에서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의 근로자는 가장 고통이 덜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들은 중소기업 근로자에 비해서 높은 임금을 받았고, 정리해고를 당하더라도 상당한 퇴직금을 받을수 있었고, 많든적든 저축도 할수있는 처지였다. 퇴직금은 커녕 밀린 월급도 못 받은채 직장을 떠나야했던 많은 영세근로자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들은 또 무엇보다 막강한 노조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억울하게 당할 염려도 없다.
그들이 시위나 파업을 벌일때 대부분의 시민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일반 근로자들의 처지가 그들보다 훨씬 나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택시를 타면 어김없이 지하철노조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기사들을 만날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정부로서는 아무리 노조를 봐주고 싶어도 봐줄수가 없는 입장이다. 정부는 강경노조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국내외의 압력에 포위돼 있다. 한국에 이미 투자했거나 앞으로 투자하려는 외국기업들은 그렇지않아도 한국의 노조에 공포를 품고 있는데, 정부가 불법파업을 용인한다면 대부분 고개를 돌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1980년의 사북(舍北)을 기억할 것이다. 4월20일부터 나흘동안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광원(鑛員)들의 난동이 계속됐다. 최대의 민영탄광이던 동원탄좌의 4,000여 광원들은 임금인상과 어용노조퇴진을 요구하며 온시가지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노조지부장의 아내를 묶고 린치를 가했다. 남편의 덕이라곤 본 일이 없이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는 가엾은 여자는 어제의 동료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치유될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개발독재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이 신군부의 계엄령아래 터트린 몸부림은 그처럼 처참했고, 스스로를 제어할수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우리는 사북으로부터 먼 길을 달려왔다. 시간으로도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우리사회의 한 기둥을 형성하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됐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의식, 노동운동을 키우는 환경, 사(使)와 정(政)의 의식도 그만큼 성장했을까. 지하철노조의 한 간부는 파업철회 결정이 나자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원없이 싸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얻은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저 원없이 싸워 후회가 없다니, 슬픈 말이다.
우리는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사정 모두가 양식과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노사정 모두에 대해서 불만스럽지만, 이번에 드러난 노동운동의 지도력에 대해서 특히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수 없다. 집단의 힘은 자칫하면 폭력이 되고, 폭력은 반드시 희생자를 낸다.
얻은것 없는 파업에서 사북의 노조지부장 아내처럼 희생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사북으로부터 멀리 왔다. 아직도 남아있는 사북을 극복해야 한다.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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