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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의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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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의 무도회

입력
1999.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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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의 무도회

1999/04/22(목) 19:47

도둑이 온 나라를 흔드는 세상이다. 도둑의 말 한마디에 온 국민의 귀가 쏠리고 온 사회가 삐꺽거린다. 세상이 온통 도둑판이라 도둑들이 판치는가. 그 속에 누가 도둑이고 누가 도둑이 아닌지, 참으로 혼란스럽다.

소위 「고관집 도둑」이 한바탕 사회를 들쑤셔 놓더니 뒤늦게 그 발설의 신빙성에 의문이 생기자 주춤해지기는 했으나 이 사건이 들추어낸 우리 사회의 맹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참으로 경악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도둑은 다른 고관들은 차치하더라도 도둑잡는 포도대장인 경찰서장 집을, 그것도 한군데가 아니고 두군데나 털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에나 나옴직한 일이요 세계 대도열전(大盜列傳)에 도전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더욱 경악할 일은 이 경악할 일을 보면서도 경악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경찰서장 집에 도둑이 든 사실보다 서장집의 꽃병속에 돈뭉치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더 놀라워 한다.

도둑이 경찰서장 집을 의도적으로 노린 것이라면 축소·은폐수사의 약점을 역이용하자는 계산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사회를 조롱하는 것이다.

사회가 모욕당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서장 집도 털리는 나라에서 어느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겠는가. 도둑을 향해서도 치안당국을 향해서도 이에 대한 분노가 앞설법 한데 국민들은 이 보다도 훔쳐 들고 나온 돈뭉치에 대해 더 분노한다.

도둑맞은 것으로 거명된 다른 고관들의 경우도 관심들은 도난당한 금품들의 출처로 쏠린다.

그만큼 공직사회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말이다. 그리고 물론 혐의 있는 곳에 수사는 있어야 한다. 우연히 발길에 차여서 드러난 것이든 도둑이 물고 나온 것이든 그것이 수사할 필요가 있는 혐의일 때는 수사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그 도둑질의 부산물이 아무리 사회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 도둑질이 미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도둑질이 악행인지 선행인지 가치의 마비가 생긴다. 도둑들이 도둑질로 얻은 정보로 양심선언을 하기 위해 일제히 도둑질을 시작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도둑의 미덥지도 않은 양심선언에 솔깃하는 사회의 양심은 부끄럽다.

사회에 숨겨진 다른 도둑의 적발을 도둑들에게 맡긴다면 도둑이 보안관인가. 사회가 도둑을 고발하지 않고 도둑이 사회를 고발하는 사회는 안전하지 못하다. 부도덕한 도둑의 도덕성을 믿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손가락질은 도둑맞은 피해자쪽으로만 향해 있지 도둑질한 범인에게는 아무 지탄이 없다. 이른바 생계형 절도도 아니고, 금색 돛대에 자줏빛 돛을 달고 은으로 된 노를 저으며 가무성연(歌舞盛宴)으로 지중해를 휩쓸고 다니던 로마시대의 해적처럼 호화생활을 하고 다닌 도적에게 적개심이 없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은 물론 국가적 과업이다. 이에 못지 않게 일반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고 오히려 더 기본적인 국가적 책무다.

도둑은 큰 소리 치고 피해자는 빌빌 기는 세상, 도둑은 훔친 것을 까발리고 피해자는 한사코 도둑맞은 것을 감추는 세상, 비리의 적발을 도둑의 고발에나 기대는 세상, 이런 뒤죽박죽의 희한한 세상이 우리 사회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도둑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도둑이 자기 입으로 발설한 것은 고위공직자들이 자기보다 더 큰 도둑이라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도둑의 검증되지 않은 발설을 대변한 한나라당은 지금 궁지에 몰린 처지가 되었지만, 도둑맞은 거금의 출처를 대라고 한나라당이 입에 거품을 물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오랜 여당생활을 한 저들이 도둑을 맞으면 말짱할까 하는 말을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

어느 도둑이 어느 도둑을 나무라느냐는 생각들이다. 이렇게 온통 서로를 도둑으로 의심하는 우리 사회다.

고관집 도둑의 공범인 도둑의 집에 다른 도둑이 들었다고 한다. 도둑위에 도둑이 있다. 이것은 서로를 도둑이라고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야유다.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희극인 「도둑들의 무도회」에는 귀족행세를 하고 있던 도둑들이 도둑의 가면을 쓰고 가면무도회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진짜 도둑이 도둑으로 가장을 한 것이다.

어느 얼굴이 정말 도둑의 얼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우리 사회가 바로 이 무도회 같다. 도둑의 장단에 온 나라가 춤추고 있으니 영락없는 도둑들의 무도회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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